총수들의 뻔한 재판 방정식

총수들은 구속만 되면 아픈 모습으로 나타난다.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비즈니스를 하던 평소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췌해지고, 다양한 증상을 호소한다. 병보석을 신청하기 위한 사전 다지기인가.

 
2012년 10월 김승연 한화 회장의 항소심 첫 공판이 열린 서울고등법원. 그는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집고 법정에 나타났다. 수염도 깍지 않아 초췌해보였다. 김 회장은 수감 생활 중 발목을 접질려 복숭아 뼈에 금이 갔고, 깁스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회장은 두 달 전인 8월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됐다. 김 회장의 징역 4년 실형 선고는 당시 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그룹 총수들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이날 눈에 띈 것은 유난히 아파보이는 김 회장의 모습이었다. 재계에서 ‘호탕하다’고 알려진 평소 김 회장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 회장이 법원 출석 시 아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4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2007년 5월 김 회장은 ‘아들 보복 폭행’으로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됐다. 같은 해 7월 1심 공판에서 그는 보복폭행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며칠 뒤 김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병보석을 신청했고,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9월 선고공판. 김 회장은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탄 채 법정에 들어섰다. 당시 김 회장은 수감생활 중 우울증•심장질환 등을 호소하며 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 김승연 한화 회장은 10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목발을 집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2007년 9월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들어섰다.
김 회장은 현재 서울남부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다. 과거(2007년 수감)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직 병보석 신청 계획은 없다고 한화 측은 설명했다.

그룹 총수가 법원에 출석할 때 아픈 모습을 보이는 것은 김승연 회장만이 아니다. 최근 이윤재 피죤 회장•이호진 태광 전 회장이 그랬고, 과거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정몽구 현대차 회장•정태수 한보 전 회장•김우중 대우 전 회장 역시 똑같이 법정에서 아픈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구속만 되면 외형적인 모습이 180도 바뀌었다.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비즈니스를 하던 평소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췌해지고, 다양한 증상을 호소했다. 그리고 휠체어를 탔다.

이를 비꼬는 ‘휠체어를 탄 회장’이라는 말이 나온 지는 옛말이다. 2007년에는 한 외신이 “As things get tough, S Korea’s bosses get rolling(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한국의 총수들은 휠체어를 탄다)”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깔끔한 정장에서 환자복 차림으로

이윤재 피죤 회장 역시 이 비난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2011년 10월 환자복을 입고 강남경찰서에 출두했다. 2012년 1월 항소심 첫 공판에선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이 회장은 ‘청부폭행’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회장의 변호인은 “고령(1934년생)과 지병으로 건강이 매우 악화돼 양형을 줄여 달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또 건강 악화를 이유로 법원에 구속집행정지 및 병보석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회장이 청구한 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 관계자는 “형이 무거워 항소가 기각됐고 실형을 선고했다”며 “보석도 허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기각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하지근육경련으로 쓰러진 뒤 휠체어를 타고 다녔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은 올 9월 복역(징역 10개월)을 마치고 출소했다. 하지만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죤 비서실 관계자는 “지난해 구속기소(2011년 11월)된 이후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근 이 회장은 비자금•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또다시 받고 있다.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그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호진 태광 전 회장의 상황도 비슷하다. 이 전 회장은 2012년 2월 거액의 회사 자산을 빼돌린 혐의로 실형(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기 위해 환자복을 입은 채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이 전 회장은 2011년 1월 구속기소 이후 줄곧 환자복을 입고, 마스크를 하고, 휠체어를 타고 재판대에 섰다. 2011년 1월 검찰 소환 당시 깔끔한 양복 차림과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의심될 정도다.

 
이 전 회장은 현재 구속집행정지 상태다. 그는 2011년 4월 건강상의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고, 올해 4월까지 총 12번을 연장했다. 5월에는 병보석을 청구했고 법원의 승인을 받았다. 7월에는 간이식 사전검사를 위해 법원의 허가를 받고 미국에 다녀왔다.

현재 이 전 회장은 국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얘기다.

재벌 총수들이 법정에 아픈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건강 악화를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병보석 등의 절차를 밝기 위해서다.

법조계 관계자는 “총수들이 환자복을 법정에 나오는 것은 ‘난 아프니 구치소 또는 교도소에 갈 수 없다. 병보석 청구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구속 기소된 상황이라면 구치소에서 주기적으로 왕진 치료를 받는 것도 비슷한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아픈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총수들이 TV•신문 등 언론을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 굳이 아픈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해석이 대부분이다. 구속 후 병원에서 진단을 받는 게 총수들의 재판 순서라는 얘기도 나온다. ‘구속 기소→구치소 수감→구속집행정지•병보석→병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집행유예•특별사면이 더해지면 실제로 수감생활을 하는 날은 별로 없다.

동정심 유발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이영면 동국대(경영학) 교수는 총수들은 아픈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경영상의 이유를 댄다고 설명했다. 그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일에 집중했다”며 “국가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변명이 일반인들에게 통할지 모르겠지만 총수들은 아픈 모습을 보여주며 그렇게 말한다”고 말했다.

▲ “법정에만 서면 그들은 아프다.” 이호진 태광 전 회장(왼쪽)과 이윤재 피죤 회장.
사실 총수들이 구치소에 들어가면 정신적인 패닉이 온다고 한다. 구치소 의료과의 한 담당자는 “수감자 대부분은 좁은 공간에서 오는 불편함과 자유에 대한 박탈에서 오는 상실감을 겪는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총수 또는 인사가 구치소에 들어오면 상실감•박탈감이 엄청날 것”이라며 “밖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자유마저 빼앗긴다면 어떻겠느냐”고 덧붙였다.

수감 중 패닉은 정신력의 차이

그렇지 않은 인물도 있다. 손길승 SK 전 회장이다. 그는 2004년 6월 분식회계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손 전 회장은 구치소 생활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잠 들 때까지 군소리 한번, 불평 한번 늘어놓은 적 없었다는 게 구치소 한 관계자의 말이다. 정신적인 패닉은 손 회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도관들은 물론 재판관마저 “존경할 만한 피고인”이라고 말한다. 한 교도관은 “손길승 전 회장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며 “정말 강직하고 묵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총수가 패닉에 빠지는 것은 정신력의 차이 때문인가. 사실 총수들이 구치소에 들어가면 패닉에 빠진다고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진실은 오직 총수 자신만이 알고 있다. 그들은 출소 후 바로 경영에 뛰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몇 개월 실형을 살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패닉은 거짓인가. 아니면 총수와 전문경영인(CEO)의 차이인가.

박용선 기자 brave11@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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