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대희 性 칼럼

결혼제도가 정착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로마시대 이후 결혼제도가 뿌리내린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한다. 정신적으로 광적 상태에서 로마를 불사른 폭군 네로는 성년 시절 수년간 자기를 낳은 모친과 섹스를 하며 살았다.

미녀 여왕의 대명사처럼 호칭되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녀보다 한참 어린 두 남동생과 짝을 이뤄 살았다. 클레오파트라의 파트너가 10세 이하의 어린 남동생이었던 것은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으려는 고대 신앙의 산물이었다.

현대적 왕권이 성립되기 이전의 고대 사회는 여성의 입김이 세게 작용했던 모권사회母權社會의 틀을 타파할 대안이 없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명문가 출생인 남자 중 상당수가 모친이나 누이동생과 성생활을 즐기면서도 그런 행위에 대한 수치심이 없었다.

그런데 기골이 장대한 근육질의 사내들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그들이 군사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면서 사회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남성영웅들이 나타났다. 충동적인 성욕의 소유자인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호색의 경향을 노출했다. 한 사내가 많은 여자를 거느리며 쾌락을 즐기는 새로운 사회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광활한 중국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한 사람은 진시황이 최초다. 만약 당시 그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진秦의 대륙통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런던 올림픽에 물결치는 오성홍기五星紅旗를 흔드는 대규모 응원군단을 구경하기도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군웅할거하던 난세를 간단하게 통일한 중국 진시황은 고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난교를 제도화했다. 진시황은 주변의 6국을 정벌하고, 거기서 얻은 각국의 후궁 전원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었다. 천하를 통일한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한 건설사업이 미녀집단을 수용할 거대한 궁전을 짓는 일이었다. 커다란 하렘(이슬람 국가에서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일컫는 말)이 완공되자 피부색이 각각 다른 외지의 미녀를 모두 그 대궐 속에 가둬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을 8개의 등급으로 구분, 정해진 침실에 수용했다. 첫째 등급은 황후皇后, 둘째는 부인夫人이었다. 다음은 미인美人, 양인良人, 팔자八子, 칠자七子, 장사長使, 소사少使의 순이었다. 이는 하나의 관직이면서 섹스의 등급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돼 있었다. 이들 후궁이 대전의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자유스러웠다. 이런 군주의 후궁조직은 스캔들이 궁정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무마하는 데 있어 특별한 처리방법이었다.

시황제始皇帝를 효시로 지배자가 바뀌어도 이 제도는 답습됐다. 후대에 이른바 ‘3000 궁녀’라는 칭호로 불리며 후대를 받았다. 진시황 사후 이 제도는 그다음으로 이어지며, 그 후로 현대사회로 연계될 때까지 한시도 끊어져 본 적이 없다.

이런 진시황 방식과 다른 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사람은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 황제였다. 하렘이라는 말은 여기서 생겼는데, 흥미로운 것은 하렘에는 인종적 편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원칙 아래 터키 제국을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채홍사(미녀를 발탁하는 관리) 조직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요즘의 예능프로덕션의 스카우트처럼 귀엽게 생긴 처녀가 어디에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녀를 잡아들이기 위해서 1000리 길을 달려가는 걸 마다치 않았다.

이런 제도가 후대에 이를 때까지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 것은 거세된 환관이라는 사내들이 있었기 때문에 포획된 소녀가 훼손될 위험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은 환관제도가 없는 아시아의 유일한 국가였다. 환관이 없다는 건 권력자의 여인을 가로챌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유전학적 보안성이 일본의 궁녀 이야기가 피어나지 못하도록 만든 도화선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곽대희 곽대희 비뇨기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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