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대희 性 코너

어떤 사람이 동성애를 하는지 의심스러울 땐 많은 사람이 구역질나는 위장의 반응을 무릅쓰고 색안경을 끼고 들여다볼 것이다. 범상한 것에 반하는 역설적 행위에 과민해지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 종족을 이어가는 생식생리의 짝꿍이다. 그런데 동서의 사서를 보면 유전인자의 정통성이 강조돼야할 많은 통치자가 그 파트너를 선정할 때 그런 반대의 성性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일찍이 중국의 남제南齋라는 소국가의 소소업蕭昭業 황제는 섹스 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총애했다고 사서에 기록돼 있다. 호모 섹스에 어찌나 탐닉했던지 그가 총애하는 측실의 정부情夫가 자기의 황후와 대놓고 관계하는 것을 내부적으로 허락할 만큼 분별력을 상실했다.

동성애를 즐기는 황제로 소소업과 선두를 다투는 사람은 한漢의 애제哀帝였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놀았던 상대는 동현董賢이라고 하는 대단한 미소년으로 둘 사이의 정애情愛는 남달리 깊었다. 동현에 대한 애제의 총애는 상상을 초월해서 외출할 때에는 같은 수레에 나란히 동승했고, 궁전으로 돌아오면 같은 침대로 들어가서 서로 얼싸안고 잤다. 짧은 시간 낮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미소년은 장성한 후 광록대부光祿大夫라는 높은 관직에 기용됐다. 어느 날, 이 두사람이 낮잠을 자다가 황제가 먼저 눈을 떴다. 가만히 살펴보니 황제의 옷소매가 동현의 머리 아래에 깔려 있었다. 그 옷깃을 빼려고 하다가 자칫 동현의 단잠을 깨울지 모른다는 생각에 황제는 자기의 옷소매를 잘라내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고사故事에 의해서 단수斷袖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는 중국어로 동성애를 의미한다.

프랑스에서는 동성애로 인해 일대가 단절될 뻔한 일이 2~3차례 있었다. 당시에 유럽 전역에 프랑스의 앙리3세는 호모기 때문에 후손이 머지않아 단절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1~2년 내로 왕의 후사後嗣가 끊어지는 변고가 발생했다. 그 후사를 논의하는 왕가의 비상대책회의가 긴급 소집됐는데, 왕에게는 슬하에 왕자와 공주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왕비 쪽에서 그 후계자를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고안한 비책이 왕비의 샛서방(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 몰래 관계하는 남자)을 즉위시키는 것이었다. 이 샛서방은 이교도인 프로테스탄트라는 약점에도 왕으로 즉위해 앙리4세가 됐다. 왕비의 샛서방이면 남편인 왕과 동급으로 간주돼야 한다는 왕비 인척들의 주장을 꺾지 못한 앙리 왕가에서는 그 주장에 상응하는 인물을 찾지 못해 결국 왕비의 간부姦夫를 후계자로 선정하는 난센스가 발생한 것이었다. 원래 프랑스의 법률은 남계男系의 직계상속밖에는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앙리4세의 자식인 루이13세도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또 한 번 가계단절의 위험이 불어 닥쳤지만 우연한 만남으로 후손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해 여름에 루이13세가 사냥에 나섰을 때 예기치 않았던 집중호우를 만났다.

루이13세는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를 피해서 한 정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빗물에 젖은 드레스를 벗고 반라의 몸으로 쉬고 있던 왕비를 만나서 오랜만에 섹스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그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수태가 성립되고 거기에서 출생한 아들이 ‘짐朕은 국가다’고 외쳤다는 루이 14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루이 13세와 14세는 부자간인데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니까 간통이 빈번했던 시기 왕가의 왕위 승계에는 요즘 같으면 대법원의 심판이 개입해야 할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서 왈가왈부 쑥덕거렸다는 후일담이 전해졌다.
곽대희 곽대희비뇨기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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