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IB 플랜의 허와 실
몸집은 커졌는데 IB다운 IB는 없어
발행어음 IB 육성 필요충분조건일까
스타트업‧벤처 지원에 인색한 증권사

금융당국이 초대형 IB 프로젝트를 본격화한 지 5년이 흘렀다.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겠다’는 거창한 슬로건 아래 국내 증권업계의 자기자본은 50조원에서 60조원대로 늘어났다. 몸집을 제대로 부풀린 증권사 중엔 발행어음 업무를 따낸 곳도 있다. 하지만 국내 자본시장엔 여전히 초대형 IB는 없다. 어찌 된 일일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초대형 IB 플랜의 허와 실을 짚어봤다. 

국내 증권사의 자기자본 규모가 크게 늘었지만 제대로 된 투자은행(IB)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사진=뉴시스]
국내 증권사의 자기자본 규모가 크게 늘었지만 제대로 된 투자은행(IB)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사진=뉴시스]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육성하겠다.” 2013년 정부가 초대형 IB(투자은행)를 만들겠다면서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다. 그해 정부는 증권사가 선진형 투자은행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돕겠다면서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제도를 도입했다. 골자는 일정 요건(자기자본 3조원 등)을 갖춘 증권사에 기업 신용공여 업무를 허용하겠다는 거였다.

한국판 골드만삭스, 이를테면 초대형 IB 프로젝트가 본격화한 건 2016년에 들어서다.
정부는 그해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의 증권사에 발행어음 업무를 허용했고, 자기자본이 8조원 이상이면 고객이 맡긴 예탁금을 운용할 수 있는 종합투자계좌(IMA·Investment Management Account)를 허용했다.2017년에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본시장법 시행령과 금융투자업 규정도 개정했다.


국내 증권업계에 대형화 바람이 분 것도 이 무렵이다. 2014년 12월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의 인수·합병(M&A·현 NH투자증권)을 시작으로 2016년 4월 대우증권·미래에셋증권, 2016년 10월 현대증권·KB투자증권(현 KB증권) 등 굵직굵직한 M&A가 이뤄졌다.

한국투자증권과 삼성증권은 정부가 제시한 초대형 IB의 자기자본 규모를 맞추기 위해 각각 1조7000억원, 35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2016년 54조3000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50조원대를 돌파했던 국내 증권사의 자기자본은 지난해 67조8000억원으로 24.8%(13조5000억원)나 증가했다. 초대형 IB의 기본 요건인 몸집 불리기에는 성공한 셈이다.


지난해 말 국내 주요 증권사의 자기자본 순위는 미래에셋증권이 9조2857억원으로 1위를 기록했다. 그 뒤를 한국투자증권(5조8137억원), NH투자증권(5조8028억원), 삼성증권(5조3168억원), KB증권(4조9407억원)이 쫓고 있다.

하지만 IB를 둘러싼 평가는 썩 좋지 않다. 무엇보다 실적이 신통치 않다. 금감원의 ‘2020년 증권선물회사 영업실적(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증권사의 IB부문 수수료 수익은 3조9351억원으로 전체(13조6511억원)의 28.8%를 기록했다. 2019년의 36.0% 대비 7.2%포인트 낮아진 수치다.
 

증권업계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IB업무가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발행하기 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증시가 활황이던 2018년 자기자본 1조원 이상 증권사의 IB부문 수수료 비중은 25.4%로 중형 증권사(1조원 이하)의 32.4%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증권사 IB부문이 정부가 추진했던 플랜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가 초대형 IB를 육성하겠다고 나섰던 건 모험자본 공급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이는 한낱 공염불에 그쳤다.

모험자본 공급 역할 미미


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KB증권이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13조원 중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 투자한 자금은 476억원으로 전체의 0.3%에 불과했다. 단기성과에 집중하는 증권사 특유의 영업 형태가 여기서도 나타난 셈이다.

증권업계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해명했다. 업계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증권사 발행어음의 만기는 1년 이내로 길지 않다. 짧으면 2~3년 길게는 5년 이상 보고 투자해야 하는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의 비중을 늘리는 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물론 모험자본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해 놨다. 하지만 수익성과 건전성을 모두 따지다보니 대상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발행어음에 매몰된 초대형 IB 육성 방안이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낮았다고 꼬집고 있다. 강경훈 동국대(경영학) 교수는 “정부가 초대형 IB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자기자본을 키운 증권사에 은행업무의 일부를 허용해준 것에 불과하다”며 “이를 통해 초대형 IB가 출현하길 기대한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은행 업무를 증권사에 일부 할당하면 골드만삭스와 같은 초대형 IB가 출현할 것이란 계산 자체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금융당국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IB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금융당국이 자기자본 8조원 이상 회사에 종합투자계좌업무(IMA)를 허용하기로 결정한 지 5년이 흘렀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아직도 마련되지 않았다. 최근엔 IMA 도입을 처음부터 재검토할 수 있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IB 육성과 예고된 문제들

금융당국 관계자는 “증권사가 발행어음 사업에 진출한 이후 여러 문제가 노출되면서 IMA 제도를 향한 의문이 커졌다”며 “여러 방안을 두고 검토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결국, 금융당국의 부실한 정책과 단기성과만 중시하는 증권사가 초대형 IB의 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경제학) 교수는 “은행업무를 하게 해달라는 증권업계의 볼멘소리를 금융당국이 들어주다가 결국엔 놀아난 꼴”이라면서 말을 이었다.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쓸 수 있도록 허용한 게 초대형 IB 프로젝트의 전부다. 증권사가 IB 업무를 잘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아니라 금산분리 규제를 피해 은행업에 진출하게 해준 셈이다. 이런 상황이니 IB가 해야 하는 자금조달 업무가 제대로 이뤄질 리 있겠는가.” 금융당국이 귀담아들을 만한 일침이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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