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낙하산 어떻게 막았나
고위직 가려면 면접 거쳐야
상호견제의 톱니바퀴

조선시대에도 ‘시험’과 ‘낙하산’은 있었다. 고위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추천’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추천하는 사람의 마음대로 등용이 가능했던 건 아니었다.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고, 이 부서의 업무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부서도 존재했다. 상호견제의 톱니바퀴 속에서 낙하산을 솎아냈다는 거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 견고한 시스템은 무너졌다.

조선시대 관리 등용 방식은 ‘과거’와 ‘천거’로 나뉜다.[사진=연합뉴스]
조선시대 관리 등용 방식은 ‘과거’와 ‘천거’로 나뉜다.[사진=연합뉴스]

‘공무원 시험’은 역사가 오래된 제도다. 6세기 중국 수나라에서 시작해 우리나라에선 10세기 고려 광종 때 도입했다.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기 시작하면서 고위 공직자나 개국 공신의 후손이 조상의 ‘덕’으로 관직에 오르는 ‘음서蔭敍’의 힘은 조금씩 약해졌다.

그런데도 ‘낙하산’을 향한 우려는 항상 있었다. 시험을 통과해 관리가 되더라도 고위직에 오르려면 결국 ‘추천’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끄는 추천 제도의 위험성을 옛사람들도 모르지 않았다. 실제로 고위 공직자의 자식들이나 친인척을 관리로 만들려는 시도는 숱하게 일어났다. 물론 이를 막기 위한 방법들도 있었다. 

실례를 들어보자. 태종 2년(1401년) 사간원에서 왕에게 탄원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관원이니 더욱 가려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수령을 뽑아 쓰는 것이 높은 관직부터 한양의 관아까지 모두 천거할 수 있기에 그 선발의 폭이 넓지만 가끔 일가친척이라는 이유로 적절하지 못한 자가 천거돼 의지하는 세력을 믿고 법을 무시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해 백성에게 해를 끼칩니다.”

지방으로 파견하는 수령이나 한양 내 관직에 사람을 임명할 때 추천을 받아 사람을 쓰다 보니 무능력함이나 쓸데없는 세력화를 우려한 거다. 사간원은 문제를 지적하는 한편 태종에게 사람을 뽑아 쓰는 절차를 강화할 것을 조언했다.

“앞으로는 사람의 천거를 삼부三府(의정ㆍ승추ㆍ사평), 대간臺諫(사간원ㆍ사헌부), 정조政曹(이조ㆍ병조)에만 허락하고 드러난 행적을 기록해 아뢰게 하여 새로운 선비는 반드시 직접 만나시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책을 물어 임명하십시오.“

 

’‘'천거'에는 공동 책임이 따랐고 대간의 서경권으로 무효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사진=뉴시스]
’‘'천거'에는 공동 책임이 따랐고 대간의 서경권으로 무효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사진=뉴시스]

정조라고 불리던 이조와 병조는 ‘인사권’을 행사하던 주요 기관이었다. 공석이 생기면 후보자 3명을 추천하고 이중에서 왕이 적임자를 골랐다. 물론 정조가 추천한다고 해서 왕이 무조건 수용하는 건 아니었다. 관리 등용과 관련한 법이 있었고 왕 또한 법에 따라 움직였다. 세종도 이조의 인사 업무에 의문이 있을 때 법을 다시 짚기도 했다.

세종 11년(1429년) 이조에서 전前 사직司直(정5품 군직)이었던 안숭신을 천거했다. 경기좌도 찰방(역참 일을 맡아보던 정6품 지방직)으로 삼으려 했던 거다. 세종이 이의를 제기했다. 죄를 범한 관리는 반드시 먼저 글로 알린(계도) 뒤 쓰게 되어 있는데 어째서 아뢰지도 않고 갑자기 추천했는가.

왕도 관련법에 따라 인사 낙점 

세종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종 10년(1428년) 안숭신은 형조좌랑으로 있을 때 뇌물죄로 곤장 70대를 처벌받았지만 공신의 손자라는 이유로 논죄를 피했다. 이듬해 4월에는 기근으로 함경남도 북청부의 백성 세 사람이 부종으로 고통을 받고 이사까지 해야 했다.

당시 함길도 도사였던 안숭신은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함길도 경차관敬差官(특수 임무를 맡은 지방 파견 관리) 박이창이 조사해 밝혀냈다. 세종은 그 즉시 안숭신의 관직을 파면했다.


안숭신은 뇌물을 받은 데다 백성까지 제대로 돌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이조가 추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안숭신은 호조판서 안순의 아들이었다.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가 안순과 친분이 있었고 황희는 정승이 된 후 안숭신을 높은 벼슬에 ‘천거’했으며 이조는 이를 따랐다. 황희의 ‘낙하산’ 요구에 이조가 굴복했던 거다. 결국 안숭신은 경기좌도 찰방에 오르지 못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세종처럼 어진 왕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안숭신 같은 인물은 관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 조선엔 낙하산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고 봐야 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조선엔 ‘낙하산’을 막을 더 무서운 비책이 있었다. 그건 ‘공동 책임’이다. 천거로 등용한 관리가 도덕성에 흠결이 있는 경우 천거를 한 관리까지 처벌받았다.

태종 2년(1402년) 사헌부는 부원군 민제, 총제, 윤곤, 호군, 이공효를 탄핵했다. 천거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헌부가 자의적으로 판단한 건 아니다. 조선 초기 법전인 「경제육전」이 남아 있지 않아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법엔 ‘적임자를 추천하지 못했을 경우 추천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사람을 추천하고 그가 등용된 후에도 추천한 사람(거주擧主)이 책임을 지고 간다는 거다. ‘공동 책임’의 범위도 정해져 있었다. 천거받아 관리가 된 자가 도덕(삼강오륜)을 무너뜨리거나 탐욕을 부려 뇌물을 받으면 거주는 함께 처벌받아야 했다.

권력끼리 서로 견제하는 시스템

낙하산을 막을 비책은 또 있었다. 인사 제도에 적용되는 ‘상호견제의 원리’였다. 조선시대의 감찰ㆍ언론기관인 대간은 ‘서경권署經權’을 가지고 있었다. 서경은 ‘서명’과 ‘허락’을 말한다. 정5품 이하의 관리를 등용할 때 사헌부와 사간원의 ‘허락’이 필요했다는 거다.

이조와 병조가 추천한 인물에게 문제가 있거나 다른 대신이 추천한 인물이 적합하지 않다면 대간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만들어뒀기 때문에 인사가 한쪽으로 치우치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의 공공기관 수장(사장ㆍ이사장 등)과 조선시대 관리의 임명 과정을 직접 비교할 순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까다로운 임용절차’만은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공공기관 수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임원추천위원회를 가동하지만 이조처럼 상시인사기구는 아니다. ‘서경권’이 있던 대간과 달리 현재의 언론이 공공기관 수장을 검증하는 건 쉽지 않다.

조선은 권력끼리 서로 견제하는 시스템으로 탄생하고 유지된 국가였다. 최소한 초기엔 그 틀을 유지했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 공공기관의 수장은 누가 검증하고 누가 지켜보고 있을까.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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