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커피자판기 ❷

사무실에 도착하면 커피를 내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고, 드리퍼로 차분히 커피를 내리는 건 이젠 하나의 의식같다. [사진=오상민 작가]
사무실에 도착하면 커피를 내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고, 드리퍼로 차분히 커피를 내리는 건 이젠 하나의 의식같다. [사진=오상민 작가]

# 매일 아침 ‘드립커피’를 마신다. 맛도, 향도 아메리카노보다 깊은 것 같아 좋다. 한데 어쩔 땐 궁금하기도 하다. 난 언제부터 커피를 내려 마셨을까. 

# 커피를 처음 마신 건 고등학교 때였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커피를 마신다는 말을 듣고 ‘자판기커피’에 입문했다. 내 성적이 오르는 기적 따윈 벌어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때 커피란 녀석이 내 삶에 들어온 것 같다.
 
# 지금이야 드립커피를 즐기지만 학창 시절 땐 ‘자판기커피’가 최고였다. 동전 몇개만 넣으면 툭 떨어지는 그 커피는 달달하면서 상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 그런 커피를 뽑아내던 자판기를 얼마 전 만났다. 한옥 해체현장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낡은 커피자판기였다. 문득 많은 추억이 내 머리를 스쳤다. 길걷수다, 길에서 만난 커피자판기 두번째 편이다. 

커피자판기를 바라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사진=오상민 작가]
커피자판기를 바라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사진=오상민 작가]

음료가 나오는 맨 밑에 박힌 ‘작은 문’은 노란색 테이프로 꽁꽁 막아놨다. 거스름돈이 나오는 구멍엔 바람만 스산하게 오가는 듯하다. 얼마 전 창신동 마을 속 한옥 해체 현장에서 몇년 전까지 사람들에게 커피를 공급하던 ‘자판기’를 만났다.

그 모습이 너무 남루해서인지, 생을 다한 모습이 안타까워서인지, 아님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커피자판기에 얽힌 기억들이 줄줄이 소환됐다. 

내가 커피자판기를 만난 건 중고등학교 시절이다. 자연스럽게 동네 친구와 도서관을 함께 다닌 난 출출해지기만 하면 도서관 마당 옆에 있는 커피자판기로 가서 레몬차•율무차를 뽑아놓고 ‘토크 콘서트’를 열곤 했다. 말이 콘서트지 실은 ‘수다 한마당’이었다.  

그러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커피를 마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도 커피를 마시면 친구처럼 공부를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도서관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기 시작했지만, 이게 웬걸. 내 성적이 그 친구처럼 좋아지는 기적 따윈 없었다. 공부는 공부, 커피는 커피였다. 

동네를 뒤져 겨우 커피자판기를 찾아냈다. 과연 작동은 될까 싶은 외관이다. 조심스레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우우웅, 쪼르르. 다행히 자판기는 제 역할을 해냈다. [사진=오상민 작가]
동네를 뒤져 겨우 커피자판기를 찾아냈다. 과연 작동은 될까 싶은 외관이다. 조심스레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우우웅, 쪼르르. 다행히 자판기는 제 역할을 해냈다. [사진=오상민 작가]
따뜻한 맛에 한모금, 달달한 맛에 한모금. 홀짝거리다보면 한잔 금방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따뜻한 맛에 한모금, 달달한 맛에 한모금. 홀짝거리다보면 한잔 금방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상아탑 커피자판기의 추억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삼수를 했다. 일상은 반복 그 자체였다. 매일 아침 수능입시학원에 도착하면 친구들과 자판기 앞으로 가서 커피를 뽑는다.

곧바로 옥상으로 올라가 한손엔 커피를, 다른 한손엔 담배를 들고 입을 번갈아가며 ‘커피 & 담배 타임’을 즐긴다. 달달한 커피 한모금에 쓰디쓴 담배 한모금은 웃픈 재수삼수생의 인생을 닮았다. 

하여간 난 대학에 들어갔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커피’도 쫓아왔다. 대학교에 가서도 아침마다 한잔, 오후에 한모금, 저녁에 또 한잔…, 커피는 온종일 마시는 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커피는 자판기에서 뽑아먹는 거였고,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런 자판기커피는 건축이 전공이었던 내게 밤을 함께 새우는 최고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처럼 되고 싶어서 마시기 시작한 자판기커피가 공부할 때나 일할 때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돼버렸던 거다. 참, 그 공부 잘하는 친구는 지금도 커피를 좋아할까. 

따뜻한 자판기 커피를 들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을 찾는다. 커피 한잔 300원, 공짜 경치를 즐기며 한숨 돌려본다. [사진=오상민 작가]
따뜻한 자판기 커피를 들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을 찾는다. 커피 한잔 300원, 공짜 경치를 즐기며 한숨 돌려본다. [사진=오상민 작가]

■아메리카노의 시대 = 아메리카노를 만난 건 대학원에 들어갔던 2009년 정도로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자판기커피와 아메리카노가 어느 정도 ‘공존’했다. 매일 아침 매점 커피숍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쉬는 시간엔 자판기커피에 담배를 피웠다.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아메리카노는 선진국 커피 같았다. 

가격도 비싸지만, 약간 탄 듯한 구수한 향과 맑은 물, 굳이 설탕을 넣지 않아도 되는 커피라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특히 마시고 난 후 뒷맛이 깨끗해 자판기커피보다 건강하게 느껴졌다. 

지금이야 메가커피 등 ‘저가브랜드 커피’가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때만 해도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학원 매점 커피숍 아메리카노의 가격은 1200~1300원가량이었기 때문에 부담스럽진 않았다. 그렇게 난 아메리카노에 빠졌고, 그럴수록 자판기커피가 멀어졌다. 

거리엔 수많은 커피전문점이 생겼다. 사람들이 어디서든 아메리카노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커피자판기는 자취를 감췄다. [사진=오상민 작가]
거리엔 수많은 커피전문점이 생겼다. 사람들이 어디서든 아메리카노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커피자판기는 자취를 감췄다. [사진=오상민 작가]

■드립커피의 묘미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재수와 삼수의 덫에 빠져 있던 난 대학•대학원을 거쳐 직장에 들어갔다. 어쩌다 변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직장에 들어간 후부터 난 집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를 즐겼다. 이른바 ‘드립커피’다. 정기적으로 원두콩을 사서 마시기 전에 커피를 갈고 물을 끓여 내려 마시는 게 습관이 됐다. 

드립커피는 아메리카노보다 맛과 향이 더 깊다. 다양한 종류의 원두콩을 사다가 매일 아침 내려 마시는 커피는 이제 내 인생에 없어선 안 될 하루의 시작점이 됐다. 

창신동의 한 골목에서 만난 낡은 커피자판기가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언젠가 작동하는 커피자판기를 만나면 오랜만에 동전을 넣고 자판기커피를 마셔봐야겠다. 그럼 또 다른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글 = 박용준 보통사람건축사사무소 건축사 
opa.lab.02064@gmail.com 

사진 = 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뜨거운 물을 만난 원두는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동시에 커피향을 사무실에 가득 채운다. 커피를 마시기 전 이미 커피향에 매료된다. [사진=오상민 작가]
뜨거운 물을 만난 원두는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동시에 커피향을 사무실에 가득 채운다. 커피를 마시기 전 이미 커피향에 매료된다. [사진=오상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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