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❷ 

욕설 파문에 시끌벅적하더니, 이번엔 언론사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 바이든 팔짱, 빈곤 포르노 논란까지 줄줄이 터졌다. 반대편이라고 나을 게 있겠는가. 측근들이 줄줄이 소환되더니, 최측근마저 구속됐다. 정부와 집권여당을 견제해야 할 거대 야당은 민생보단 자신들이 뽑은 대표를 지키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인다. 도대체 우리에겐 어떤 리더가 필요할까. 이순신 두번째 편이다. 

진영이 대립하면서 민생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진영이 대립하면서 민생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시대가 영웅을 탄생하게 했던가. 시대가 영웅을 만들었던가. 이순신은 조선시대 제13대 왕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3개월째를 맞고 있던 1545년 3월 8일 태어났다. 명종이 즉위하고 이순신이 탄생하기 전후의 ‘조선시대 전반기’ 시대는 왕의 외척 세력을 중심으로 한 권신들의 횡포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흉년과 전염병이 거듭됐고, 왜구의 노략질도 일어나곤 했다. 민생은 피폐했고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명종의 아버지 중종은 두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와의 사이에서 원자인 인종을 낳았다. 이어 세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와 두번째 서열의 적통 아들 명종을 생산했다. 외척들간 권력다툼이 불붙을 것으로 예측하기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막상 왕의 아들을 낳고 나니 서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으로 왕위계승 경쟁을 벌였다. 

장경왕후는 오빠 윤임尹任과 함께, 문정왕후는 남동생 윤원형尹元衡 형제와 함께 힘겨루기에 나섰다. 이로 인해 세상사람들로부터 윤임은 ‘대윤大尹’, 윤원형은 ‘소윤小尹’이라는 별칭까지 얻기에 이른다.  

중종이 죽고 이듬해인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정세는 잠시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불행하게도 왕위에 오른 인종이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정세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배 다른 형에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된 명종은 나이도 나이지만, 나약해서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권력을 잡은 ‘소윤’ 윤원형 일파는 반대파를 반역 등 여러 음모와 모함으로 엮어 숙청했다.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다. 

이순신이 태어난 해에 시작된 을사사화 이후 5~6년간 100여명에 달하는 인사가 안타깝게 죽어나갔다. 명종은 나름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등 선정을 펼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렴청정은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끝났지만, 외척 윤원형과 그를 따르는 ‘윤핵관’ 등 세도가의 전횡은 대리청정을 방불케 했다고 주장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내부혼란 속에서도 왜구들이 1555년 배 60여척을 몰고 전라도에 침입, 영암·장흥·진도 등을 유린하는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발생했다. 

흉흉한 민심이 전염병처럼 확대되면서 1559년엔 ‘임꺽정의 난’이 시작됐다.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의 관아와 민가의 재물을 훔치며 종횡무진했다. ‘내란’을 방불케 하는 이 사태는 1562년에 끝이 났다.

명종은 1567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후계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있었으나 13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자 명종의 뒤를 중종의 일곱째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선조宣祖로 이순신의 나이 14세 때의 일이다.

이 시절에 순신은 자기 집 사랑방에 사숙私塾(한문 개인교습소)을 열고 친구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더 어린 시절 동네 길목에서 진을 치고 같이 전쟁놀이를 하던 아이들을 상대로 이른바 ‘낮에 운영하는 야학’의 선생님 노릇을 한 셈이다. 순신이 그 나이에 이렇게 한문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단명했지만 형들의 영향이 크다.

퇴계 이황의 문하생이었던 둘째 형 요신을 따라 이황의 문중에 자주 드나들었다. 형들을 따라 한문서숙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하며 읽었던 경전들을 같은 또래보다 훨씬 빠르게 깨달았다.

일찍부터 출중한 재주를 보이자 순신의 아버지는 어린 순신에게 충효와 정의로 심성을 수양토록 독려하고 장려했다.  이순신은 덕수 이씨 12대 자손으로 그의 시조는 이돈수李敦守다. 고려시대에 중랑장(정5품 보좌관)이라는 공직을 맡았던 이돈수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비교적 높은 직위의 벼슬을 지냈다. 특히 이순신의 5대조 이변李邊은 30세에 문과에 합격, 세종 때 충직한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직위는 예조판서, 대제학, 영중추부사 등에 올랐고 중국어에 능통해 중국 사신으로 많은 활동을 했다. 문과 홍문관 박사로 동궁에서 세자 연산군을 가르치다 종4품 벼슬 장령으로 승진한 이후 이조정랑과 병조참의까지 지낸 이거이는 증조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李貞은 관직 생활을 하지 못했다. 

유교를 숭상했던 이정은 네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은 희신羲臣, 둘째 요신堯臣, 셋째가 주인공 순신舜臣이고, 막내는 우신禹臣이다. 중국에서 태평성세를 표현하는 대명사로 쓰이는 요순堯舜시대 전후의 추앙받는 인물 복희씨,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의 이름을 따와 순서대로 붙여줬다. 

이순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평은 대체로 이렇다. “5세부터 이해력이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총명하고 영민했다. 어른을 놀랠 만한 행동이 많았다.” 

하루는 순신의 아버지가 그의 재치를 시험하기 위해 방안에 앉아 “네가 나를 마루로 나오게 할 수 있겠느냐” 물었다. 순신은 “아버지가 방 안에 계시니 마루로 나오시게 함은 극히 어렵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계신다 하면 방 안으로 들어오시게 하는 건 좀 쉬울 듯합니다. 그러니 어려운 문제보다는 비교적 쉬운 문제를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정이 껄껄 웃으며 “오냐, 네가 나를 방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보아라. 정말 쉬운 문제인가 보자” 라며 방안에서 마루로 나오고 말았다. 순신은 “아버지가 마루로 나와 앉으시니 제 계교가 성공했습니다”라며 손뼉을 치고 즐거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순신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비범함을 뽐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비범함을 뽐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이 점점 자라 8세쯤부터 근골이 발육돼 용감하고 민첩했다. 나는 새와 달리는 개를 쫓아 잡고 몇 길 높이를 뛰어오르곤 했다. 서울 거리에서 많은 아이들과 모여 놀 때 매양 진치고 전쟁하기를 좋아하는데, 순신은 언제든지 그들의 대장이 된다. 그 지휘가 법이 있고 행렬이 엄숙하여 위풍이 당당하고 질서가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 명령에 복종해 추호라도 거역하지를 못한다.

“아버지, 제 계교가 통했습니다”

비록 나이든 사람이라도 순신의 진을 범하거나 횡단통행을 하려 하면 순신은 따졌다. “어른이 되어 눈이 있어도 장수의 진을 보고도 알지 못하고 범하니 내 마땅히 그 눈을 쏘아 징계할 것이오”라며 대로 만든 활을 당겨 눈을 겨냥했다. 그러니 비록 어른이라도 하는 수 없어서 순신이 펼쳐놓은 진을 피해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은 어릴 적부터 ‘원칙’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타심’을 지닌 면모도 보여줬다. 

요즘 세상은 공정한 원칙을 지키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를 갖춘 리더를 원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니 국정은 진영논리에 빠져 혼란 속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순신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런 지도자가 있는가.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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