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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빠진 믿음의 저주
진영으로 갈라진 사람들
무너지지 않는 고정관념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
양평고속도로 사업 논란
진영 논리에 빠진 이슈들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극단적인 ‘의심’은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영화가 끝난다. 플린 신부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의심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사임한다. 교구를 떠난 플린 신부가 다시는 사제를 못하게 됐다면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플린 신부는 다른 교구로 옮겨 간다.

파스칼은 “인간은 증명된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 속 편한 대로 믿는다”고 말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파스칼은 “인간은 증명된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 속 편한 대로 믿는다”고 말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표면적으로 보면 플린 신부의 ‘의혹’을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플린 신부가 교구를 떠났으니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절반의 승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알로이시우스 수녀로선 속 터지게도 플린 신부는 다른 교구로 영전榮轉해 이동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사실상의 패배’라고 할 수밖에 없다.

플린 신부의 영전 소식을 알게 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혼란스럽고 참담하다. 그럼에도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흑인아동 성추행범’이라는 자신의 의심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제임스 수녀를 붙잡고 “나는 그 사람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도 그 사람이 의심스러운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비장하게 말한다. 

문득 ‘지동설’을 주장하다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입증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주장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재판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고 구시렁댔다는 갈릴레오의 표정이 저랬을까 싶은 장면이다. 

제임스 수녀에게 말을 건넨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느닷없이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오열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자신의 의심이 ‘합리적 의심’이 아니라 사실은 ‘믿음’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실토하는 듯하다. 불안한 의심이 걷혀 간다고 그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오열할 리는 없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모습은 마치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과 ‘신념’이 돌팔매질당하는 처절한 모습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을 남긴 17세기 프랑스 만물박사 파스칼(Pascal)은 “인간은 증명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 편한 대로 믿는다”는 어록도 남겼다. 그의 눈에 인간은 생각(믿음)이라는 것을 하긴 하지만 그 생각(믿음)이라는 게 논리적이 아니라 갈대처럼 종잡을 수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20세기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논리철학자였던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 한 토막이 전해진다. 두 사람 모두 실증주의 철학의 최고봉들이다. 어느 날 러셀과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비트겐슈타인이 한 연회장에서 논리철학적 문답을 나눈다.

비트겐슈타인: “선생님, 이 방 안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시겠습니까?”
러셀: “(테이블 밑을 장난스럽게 들여다보고,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이 방 안에 코뿔소가 없다는 게 확실하네.”
비트겐슈타인: “혹시 투명 코뿔소나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작은 코뿔소가 있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걸까요?”
러셀: “그럴 가능성은 없네.”
비트겐슈타인: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 머릿속에는 지금 분명 코뿔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 방 안에 코뿔소가 없다고 확신하십니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는 게 신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는 게 신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증거의 부재不在가 곧 사실 부존재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Absence of evidence is not evidence of absence)’란 머리 어지러운 논증법의 기원에 해당하는 문답이다. 신神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그것이 곧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신학적 논리에도 동원되는 논증이다. 

신의 존재를 믿고 싶은 사람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어도 신을 믿을 뿐이다. 결국 그렇게 사람들은 파스칼의 말처럼 증거의 유무有無와 상관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악착같이 믿는다. 가히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기백으로 믿는다. 

방 안에 코뿔소가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에게는 방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코뿔소는 안 보여도 그것이 코뿔소가 없다는 확실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처럼 플린 신부의 ‘동성애 범죄’를 믿고 싶으면 아무런 증거가 없어도 그것이 플린 신부가 ‘동성애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우리도 매일매일 ‘증거의 부재가 곧 그 사실 부존재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머리 어지러운 논리학 속에서 살아가느라 현기증이 난다. 어떤 사람이 빨갱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므로 계속 빨갱이라고 공격해도 괜찮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천재 논리학자가 밝혀낸 우리들에게 드리운 ‘믿음의 저주’다. 

아무리 설득해도 우리 머릿속에 이미 자리잡은 코뿔소는 사라지지 않는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아무리 설득해도 우리 머릿속에 이미 자리잡은 코뿔소는 사라지지 않는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런 식이라면 후쿠시마 오염수가 건강에 유해하다는 증거가 없다고 그것이 후쿠시마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고, 양평 고속도로 사업에 권력형 비리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그 사업에 권력형 비리가 없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계속 물고 늘어져도 할 수 없다. 

방 안에 눈에 보이는 코뿔소가 없다고 이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우리 머릿속에 이미 자리잡은 코뿔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딱한 일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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