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경제 ‘이분법’ 논란

▲ 지하경제 양성화는 모두가 찬성한다. 다만 명확한 기준을 두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하경제 양성화. ‘증세 없는 복지’를 선언한 박근혜 대통령이 첫번째로 꼽은 세수확보방안이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면 세수 확보는 물론 투명한 조세질서를 확립할 수 있어서다. 문제는 방법이다. 어떤 지하경제를 어떻게 양성화할 것이냐는 얘기다. 박 대통령에겐 뾰족한 해법이 없어 보인다.

증세 없는 복지’를 선언한 박근혜 대통령은 세수확보방안 중 하나로 지하경제 양성화를 꼽고 있다. 국세청이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꾸린 것에도 박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지하경제는 ‘국내총생산(GDP) 집계에서 누락된 모든 경제활동’을 뜻한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건 투명하지 못한 경제활동을 바로잡는다는 얘기다. ‘경제를 투명하게 만들겠다’는 새 정부의 정책에 반대할 이는 아무도 없다. 더구나 지하경제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지하경제 분석전문가인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린츠대 교수는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를 GDP의 24~29%로 분석했다. 한국조세연구원은 GDP의 17~19%, LG경제연구원은 GDP의 17~24%로 규정했다. 박근혜 정부는 대선공약집에서 국내 지하경제 규모 추정치를 ‘1552조원 GDP의 24%(19.2%와 28.8%의 평균)’라고 내다봤다. 지하경제를 1%만 줄여도 수조원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 작업이 성공하면 조세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그럼 지하경제에 속하는 영역은 무엇일까. 윤여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2005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지하경제를 화폐거래ㆍ비화폐거래ㆍ합법적 행위ㆍ불법적 행위 네가지로 나눴다. 불법적 화폐거래는 매춘ㆍ도박ㆍ밀수ㆍ모조품 제조ㆍ뇌물수수ㆍ고액불법과외ㆍ불법정치자금 등이다. 불법적 비화폐거래는 약물ㆍ마약ㆍ장물을 현물로 거래하거나 본인이 사용하기 위한 약물재배까지 포함된다.

 
합법적 화폐거래는 경제활동은 합법적이지만 소득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는 조세포탈과 징수액 축소 등의 조세회피를 말한다. 합법적 비화폐거래는 합법적 재화와 서비스의 현물거래와 이웃간 거래가 포함된다. 한국조세연구원이 분석한 지하경제 영역도 이 보고서와 비슷하다.

강병구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소장(인하대 경제학 교수)은 “지하경제의 개념은 포괄적으로 볼 때 일반적인 경제활동을 하지만 그 결과물이 GDP에 포함되지 않는 경제활동이다”며 “구체적으로는 탈세나 사회보험료 기피 등 각종 규제 회피를 위해 음성적으로 행하게 되는 다양한 블랙마켓”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정부가 규정한 지하경제의 범위가 통상적인 기준과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공약집의 복지재원 조달방안에서 ‘세정강화로 탈루세금 축소를 통해 5년간 28조5000억원을 마련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매년 고소득 자영업자와 대기업 탈루소득 과세강화로 1조4000억원, 체납정리강화로 2조6000억원,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1조6000억원을 확보한다는 거다. 

규모 큰 합법적 탈세부터 잡아야

지하경제와 고소득자ㆍ대기업 탈세를 엄밀하게 구분해 놓은 것이다. 윤여필 연구위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고소득자ㆍ대기업 탈세와 체납은 ‘합법적 화폐거래’로 지하경제에 속한다.

 
정부의 이런 자의적인 구분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지하경제에서 고소득 자영업자ㆍ대기업의 세금탈루는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강병구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업자는 매출액을 누락해 부가세ㆍ소득세를 탈루한다. 역외탈세 덩치도 크다. 차명거래를 통한 증여세ㆍ상속세의 탈루도 많다. 2008년 삼성특검에서 이건희 회장이 차명주식을 관리해서 4조원가량의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도 차명거래를 통해서다. 차명거래는 불법 사금융과 제도금융권을 잇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지하경제를 키운 원인이다.”

대표적인 세금탈루 수단인 ‘역외탈세’의 규모를 봐도 그렇다. 영국의 조세 피난처 반대운동 단체인 조세정의네트워크의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에서 해외 조세 피난처로 이전된 자산은 총 7790억 달러(약 888조원)였다. 2010년 기준 한국의 대외부채인 3600여억 달러의 2배가 넘는다. 한해 평균 22조2000억원의 돈이 GDP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거다.

박 대통령은 고소득 자영업자ㆍ대기업의 세금탈루를 막아 1조4000억원의 세수를 확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지하경제에선 1조6000억원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고소득 자영업자ㆍ대기업의 세금탈루를 제외하면 지하경제의 규모가 큰 폭으로 줄어든다. 어떤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1조6000억원의 세수를 매년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의 첫 타깃으로 가짜 석유 유통행위 근절을 실시하고 있다. 가짜 석유ㆍ가짜 양주ㆍ불법복제ㆍ매춘ㆍ도박ㆍ밀수 등에서 탈루되는 세금을 잡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런 불법적 화폐거래의 규모는 전체 지하경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고소득 자영업자ㆍ대기업 탈세를 따로 빼놓은 결과, 재래시장이나 영세 자영업자만 애먼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조6000억원의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영세상인의 세금탈루를 잡는데 혼신의 힘을 쏟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강 소장은 “고소득층이든 저소득층이든 지하경제는 뿌리 뽑아야 한다”면서 “다만 먹고 살기 위해 탈세를 할 수밖에 없었던 저소득층에는 당분간 세제혜택을 줘서 지하경제 양성화의 본래 취지인 복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또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의 기준과 방향을 정하지도 않은 정부가 국세청의 금융정보분석원(FIU) 정보 접근 확대를 추진하기로 해서다. 

국세청 권한 주기 전에 개혁부터

박원석 진보정의당(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의원은 “국세청의 FIU 정보 접근을 확대해야 하지만 부작용이 초래할 수 있다”며 “개개인의 금융정보를 다루는 것인 만큼 국세청이 정치권에 휘둘리면 안 되는데 국세청장이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현재 구조상 월권조사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세무행정 개혁이 없는 권한 강화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강병구 소장은 “FIU가 자체 조사를 통해 불법거래로 의심해서 국세청에 넘기는 금융거래 리포트는 대략 50%”라며 “국세청은 그것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의 방안으로 지하경제 양성화를 들고 나왔다. 전문가들은 “지하경제 양성화는 복지재정 마련과 별개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서도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양성화 작업을 추진해야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지하경제 양성화를 서둘렀다간 득보단 실이 많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증세보다 지하경제 양성화에 매달리고 있다. 조원희 국민대(경제학) 교수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박근혜 정부는 복지를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시장경제를 원활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복지를 생각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증세는 시장질서에 어긋나는 것이고, 지하경제는 반칙이기 때문에 지하경제 양성화만 말하는 것이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juckys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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