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강국의 초라한 뒷모습

IT강국.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별칭이다. 한국만큼 IT산업이 빠르게 성장한 나라도, IT트렌드를 재빨리 쫓아가는 나라도 없다는 찬사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정작 IT개발자의 삶은 팍팍하다. 척박한 사업 환경 탓에 개인역량을 맘놓고 발휘하기도 어렵다. 돈벌기 급급해서다. IT개발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 IT개발자의 퇴직시기가 짧아지고 있다. IT환경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 게임업체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순정(가명ㆍ34)씨. 그는 얼마 전 퇴직한 동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어렵게 복직한 지 3개월 만에 돌연 퇴사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동료가 밝힌 퇴직사유는 참담했다. “1년 동안 아이를 키우다가 복직했는데, 비즈니스 환경이 달라도 정말 달랐어요. IT기술이 매우 빨리 발전해서 쫓아갈 자신이 없어요.” 그럴 법도 했다. 동료가 휴직을 하기 전 IT환경은 웹2.0이 주류였다.

하지만 지금은 소셜 미디어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집약되는 3.0시대다. 게임산업 역시 급변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시장을 주도하던 PC 온라인 게임은 힘을 잃었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모바일 게임이 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이런 환경은 동료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순정씨는 “IT업계는 기술 변화가 빠르기 때문에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이 아니더라도 트렌드를 놓치는 순간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동료는 아마도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난 기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근로자의 정년을 60세로 의무화하는 ‘정년 보장법 개정안’(고용상 연령차별 금지ㆍ고용자 고용촉진법 개정안)이 4월 30일 국회를 통과했다. ‘정년 60세 시대’가 열린 셈이다. 정년 60세 보장법(정년보장법)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20~30대 성인남녀 1737명을 대상으로 ‘정년보장법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결과, 응답자의 77.6%가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정년보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를 살펴보면 대한민국 노동시장의 팍팍한 현실이 한눈에 읽힌다. ‘고령화 사회에 필요한 대책이라서’(63.5%)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어서’(36.3%) ‘고령근로자의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어서’(33.9%) ‘나도 혜택을 볼 수 있어서’(24.8%) 등의 답변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이 유연해진 한국경제를 감안하면 정년보장법은 한줄기 빛과 같다. 불안한 고용 생태계를 바로잡을 수 있어서다.

하지만 정년보장법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불만 때문이 아니다. 혜택을 받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어서다. 바로 IT 개발자들이다.

IT업계는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직원의 평균연령이 상대적으로 낮다. 40세가 넘은 IT 개발자는 스스로 퇴직하는 게 이곳의 불문율이다. 그중 관리자가 되는 이도 있지만 흔치 않은 사례다. IT개발자가 ‘정년 보장법’을 낯설게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T업계와 동떨어진 정년보장법

앱 개발자 최재훈(가명ㆍ30)씨가 다니는 A업체의 직원은 6명이다. A업체는 주로 중소기업으로부터 사업을 수주받는다. 대기업에서 사업권을 따낸 중소기업이 영세개발업체에 재하청을 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세 개발업체에 떨어지는 돈은 적을 수밖에 없다. 사업비가 하청과 재하청을 거치면서 줄어들기 때문이다. 최재훈씨는 “우리나라 IT업계의 메커니즘이 건설업계의 구조를 벤치마킹한 탓에 ‘하청과 재하청’ 모양새를 띠고 있다”며 “시급히 해결해야 하지만 ‘하청-재하청’ 고리가 워낙 단단해 쉽지 않다”고 꼬집었다.

40대에 접어든 IT개발자 대부분이 퇴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노동은 고된 반면 처우는 박해서다. 정년까지 버틸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얘기다. 다른 기업으로 이직할 수도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업계에선 ‘늙었다’는 40대 IT개발자가 합당한 대우를 받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젊은 IT개발자보다 ‘트렌드’를 빨리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혹자는 ‘끊임없는 자기개발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 가능하지 않겠는가’라고 묻는다. 백번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개인역량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례를 보자. 홈페이지 제작업체 이영민(가명•32)씨는 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터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을 개발할 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최소 투자로 최대 결과물을 요구하는 일이 빈번하죠. 대표적인 게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입니다. 이 제작이 수익성을 쉽게 올릴 수 있는 사업으로 떠오르면서 제작과정이 단순화됐어요. 시간과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프로그램 소스만 대입하면 홈페이지가 뚝하고 나오는 툴이 만들어졌죠. 이런 상황에선 개인역량을 쌓아봐야 소용이 없죠.”

정년 보장되는 IT 생태계 만들어야

▲ IT개발자의 정년이 보장되는 IT생택{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런 구조는 영세 IT업체의 생존을 위협한다. 소수인력이 일정한 틀에 맞춰 일을 하다 보니 콘텐트의 질이 갈수록 떨어진다. 당연히 박리다매薄利多賣로 수익을 올려야 하고, 일감이 늘어난다. 작업 완료일을 맞추기 위해 시간에 쫓기는 일도 부지기수다. 야근은 기본, 밤샘은 옵션, 주말근무는 일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상황이 이런데 수익성이 좋을 리 없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업체는 일감을 받는다.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IT 생태계가 바뀌지 않는다면 IT개발자의 정년보장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어느 대선 예비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누군가에겐 소박한 공약이 IT개발자들에게는 벅찬 희망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저녁은 언제쯤 올까.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kkh4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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