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고민

현대상선이 해운경기 불황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여기에 쉰들러가 핵심 경영 사안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2006년 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 최대주주) 지분을 매입한 쉰들러. 8년이 지난 현재 현정은 회장과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다. 어떻게 된 걸까.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알프레드 쉰들러 회장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7월 26일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홍기택 산은지주 회장이 만났다. 두 사람은 20~30분 동안 간단하게 차를 마시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 속엔 의미가 담긴 이야기도 있었다. 현 회장의 말이다. “해외에선 현대상선에 대한 평판이 좋습니다. 그리고 최근 현대건설 이행보증금 반환소송에서 일부 승소해 2000억원가량을 돌려받게 됐습니다.”

현정은 회장이 왜 국책은행의 수장을 찾은 것일까. 산업은행 측은 최근 산은지주 회장에 오른 홍 회장과의 ‘인사차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기업 총수가 국책은행을 찾아 수장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여의도 증권가엔 ‘현정은-홍기택의 만남’과 관련 다양한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결국 한 가지로 좁혀졌다. 현재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상선과 관련 ‘추후 자금 확보를 위한 방문’ 차원이라는 것이다. 때마침 산업은행은 정부정책에 따라 건설ㆍ해운ㆍ조선 등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업종의 회사채 상환 지원을 계획 중이다.

 
업계가 현대상선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상선이 그룹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계열사이자 캐시카우(Cash Cow)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지배구조를 보면, 현대상선이 현대증권ㆍ현대아산 등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현대상선이 계속해서 적자를 내고 있다. 현대상선을 통해 그룹 전체에 돈이 흘러야 하는데 반대로 현대상선이 돈을 계속해서 까먹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상선은 2011년에 이어 2012년 2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무려 8669억원에 달한다. 부채비율은 2011년 396%에서 2012년 799%로 2배가량 증가했다. 올 상반기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현대상선은 올 상반기 1948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의 실적 악화 원인은 해운경기 불황에서 찾을 수 있다. 해운업황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선행지수인 발틱운임지수(BDI)를 보면, 2010년 연평균 2700포인트에서 2011년 1500포인트, 2012년 900포인트로 떨어졌다. 올 8월에는 1000포인트대에서 맴돌고 있다.

특히 현대상선의 주력 부문인 컨테이너 선박 수급이 원활하지 않고, 경쟁이 치열해 운임 역시 쉽게 올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상선의 사업구조를 보면 컨테이너선 70%, 벌크선 16%, 유조선 7%, 가스선 4%다.

현대상선, 해운경기 회복 때까지 버틸까

그렇다고 현대상선이 두 손 놓고 해운경기가 살아나기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우선 고정비용을 절감했다. 현대상선은 선박 운항 원가 중 약 30%에 이르는 유류비를 절감해 손실규모를 축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박 수급과 시장 경쟁상황에 좌우되는 운임과 달리 유류비는 회사의 통제가 가능한 부분이다. 현대상선은 이를 통해 올 2분기 당기순이익 317억원을 기록했다.

보유 자산을 매각하며 유동성도 확보했다. 최근 현대상선은 자회사인 현대부산신항만에 1700억원 규모의 하역장비를 매각했다. 또 2010년 현대건설 입찰과정에서 채권단에 지불한 계약 이행보증금 일부(2388억원)도 돌려받는다. 앞서 언급한 정부 금융지원도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평가다. 해운시장이 어느 정도 회복하려면 최소 3년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비용절감과 일시적인 자금 조달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동시에 미래 경쟁력 확보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연구위원은 “덴마크 머스크, 스위스 MSC, 프랑스 CMA-CGM 등 3대 글로벌 해운업체가 ‘P3 얼라이언스(연합전선)’를 구축해 내년부터 세계 주요노선을 장악하는 계획을 세웠다”며 “현대상선은 물론 국내 해운사가 눈앞의 유동성 문제에만 급급해 이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고사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이미 국내 해운업계 3ㆍ4위인 STX팬오션과 대한해운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현대상선은 2위 해운업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해운경기 회복이 먼저냐’ ‘현정은 회장의 뚝심 경영이 무너지는 게 먼저냐’라는 얘기도 나온다.

사실 현 회장은 끈질기게 견디며 밀어붙이는 ‘뚝심’ 경영인으로 대변된다. 그는 2003년 남편인 정몽헌 회장 타계 이후 그룹 회장을 맡으며 그룹 경영권 분쟁ㆍ대북사업(금강산관광) 차질 등의 시련을 견뎌냈다.

특히 현 회장의 뚝심 경영은 현대아산이 진행하고 있는 금강산관광에서 잘 나타난다. 금강산관광은 2008년 한국인 관광객 피살 사건 이후 2013년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다. 현대아산은 금강산관광으로 인해 1조원(2008년~2013년 현재)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현 회장은 여전히 “금강산관광을 반드시 재개하겠다”며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최근엔 정몽헌 회장 10주기 추모식을 위해 방북해 원동연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으로부터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추모메시지’를 받으며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현 회장의 뚝심경영은 장점이지만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정은 회장은 지나치게 금강산관광만을 바라보는 경향이 큰데, 이 사업은 대북경협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북한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손해도 많이 봤다. 경영인으로서 계산이 안 되는 투자라는 지적이 많다.” 금강산관광 재개 역시 현 회장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현정은 vs 알프레드 쉰들러

▲ 알프레드 쉰들러 회장의 목적은 현대엘리베이터의 엘리베이터 사업부문을 인수하는 것이다.
현 회장은 세계 2위 엘리베이터 제조업체 쉰들러그룹과의 갈등도 풀어야 한다. 현재 현대상선은 쉰들러와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상선의 최대주주(지분율 24.13%)이고,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30.9%)다.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고, 쉰들러가 ‘2대 주주로서 투자자 가치’를 내세우며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현대그룹과 쉰들러의 비즈니스가 시작된 2004년 두 기업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시계추를 10년 전으로 돌려보자. 현정은 회장과 알프레드 쉰들러 회장은 2004년 합작ㆍ투자와 관련된 협약(LOI:인수의향서)을 맺었다.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에 투자하고, 국내에서 함께 엘리베이터 사업을 하자는 내용이다.

이후 2006년 쉰들러는 현대그룹이 범 현대가와 경영권 다툼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를 매입했다. 당시 알프레드 회장은 현 회장에게 한 통의 메일을 보냈다. “우리가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매입했다. 우리는 우호적인, 비즈니스 파트너다. 경영권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현 회장은 “앞으로 성공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만들어보자. 힘들 때 옆에서 지켜주는 게 진정한 친구다”고 답했다.

그러나 2010년 상황이 급변했다. 현대그룹의 한 임원이 알프레드 회장을 찾아왔고, ‘현재까지 협의했던 합작 내용은 없던 것으로 하자’는 내용을 전했다. ‘투자자로서 머물러라’는 의미다.

이후 현 회장과 알프레드 회장의 갈등이 시작됐다. 쉰들러는 2011년 말 현대엘리베이터를 상대로 법원에 ‘회계장부 및 이사회 의사록 열람ㆍ등사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현대그룹이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현대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2대 주주 자격으로 회계장부와 의사록을 열람하고 이를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엘리베이터는 넥스젠캐피탈ㆍNH농협증권ㆍ대신증권 등 5개 금융사와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17.1%)에 대한 파생금융계약을 맺고 우호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현정은 회장 측(현정은 회장 외 특수관계인 3.47%, 현대엘리베이터 24.13%)은 범 현대가(현대중공업 15.18%, 현대삼호중공업 6.79%, 현대건설 7.16%)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해 현대상선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엘리베이터는 파생금융계약으로 인해 5개 금융사에게 투자금에 대한 이자와 현대상선 주가 변동에 따른 원금손실을 보전해주고 있다. 올해 상반기 현대엘리베이터가 5개 금융사에게 보전해야할 평가손실액은 총 2161억원에 이른다. 2012년에는 569억원, 2011년에는 1812억원이다.

이에 따라 쉰들러는 지난해 말 현대엘리베이터가 금융회사와 체결한 파생금융계약의 만기(2015년)를 연장하는 갱신계약을 체결하거나 유사한 내용의 파생금융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쉰들러의 목적은 엘리베이터 사업 M&A

 
쉰들러 관계자는 “지배주주(현정은 회장 측)의 경영권 획득 목적으로 현대엘리베이터가 손해를 입고 있다”며 “현대엘리베이터의 기업가치가 계속해서 하락하는 것도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현대엘리베이터 관계자는 “현대그룹 계열사로서 그룹 경영권을 방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올 3월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증자와 관련 신주 발행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증자자금을 현대상선 지원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쉰들러는 1심에서 기각된 후 다시 항고했고 6월 소송을 취하했다. 하지만 이미 진행된 유상증자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알프레드 회장은 최근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적대적 M&A가 아닌 우호적 M&A는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쉰들러가 해운업 불황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의 관계를 흔들어 놓고, 이후 현대엘리베이터의 엘리베이터 사업부문을 M&A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현대상선도 적대적 M&A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이를 통해 쉰들러는 국내 엘리베이터 사업을 확대하고, 나아가 세계 엘리베이터 1위 시장인 중국으로 영역을 넓힌다는 것이다.

2006년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하며 국내에 진출한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나아가 현대상선의 경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며 현대그룹의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다.
박용선 기자 brave11@thescoop.co.kr | @brave115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