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어음의 유혹

▲ 자금난을 겪던 동양그룹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동양그룹 계열사에 투자한 투자자의 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기업어음(CP)의 유혹에 빠지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LIG건설ㆍ웅진그룹ㆍSTX그룹에 이어 동양그룹까지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CP를 활용했다가 되레 일을 키웠다. 자금난에 빠진 기업이 CP를 활용하는 건 그만큼 CP 발행절차가 간단하다는 뜻이다. 금융당국이 CP제도를 손질하고 나선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양그룹이 9월 30일 계열사인 주식회사 동양ㆍ동양레저ㆍ동양인터내셔널 등 3개 계열사의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3개 계열사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에 투자한 투자자는 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동양그룹 법정관리 신청 관련 브리핑을 가진 자리에서 “동양레저ㆍ동양인터내셔널이 발행한 CP와 동양이 발행한 회사채에 투자한 투자자는 손실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3개 계열사가 판매한 회사채와 CP의 규모는 총 1조9334억원가량이다. 이 가운데 4만2358명의 개인투자자 사들인 금액은 1조2294여억원이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CP다. 동양그룹은 연 7~8%가 넘는 고금리로 CP를 발행하며 자금난 위기를 넘겨왔다.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자 개인투자자를 상대로 CP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 웅진그룹ㆍLIG건설ㆍSTX의 사례와 유사하다.

 
유동성 위기를 맞은 기업들이 CP를 통해 자금난을 해소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CP는 사채와 전자단기사채보다 발행절차가 간편하고 비용도 저렴하다. 은행권의 대출과 달리 담보나 보증 없이 기업의 신용만으로 발행할 수 있다. 기업의 재무상태가 좋지 않아도 별다른 제약이 따르지 않는다.

기업의 재무상태나 리스크를 쉽게 감출 수도 있다. 전자단기 사채와 회사채는 이사회의 결정을 통해서만 발행이 가능하지만 CP는 CEO가 결정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더 있다.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금융감독원에 증권신고서를 내고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금감원이 정정ㆍ보완을 요구할 수 있어 자금을 신속하게 조달하려는 기업들에 큰 부담이 된다. 공시와 수요예측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하지만 CP는 이런 과정이 없어 발행이 용이하다. 만기는 1년이 대부분으로 3년 이상인 회사채보다 짧아 빠르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발행한도와 자격에 대한 제한도 없다. CP를 사려고하는 투자자만 있다면 얼마든지 부족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 가장 쉽고 간편한 기업자금 조달 방식이 바로 CP인 셈이다.

 
CP가 개인투자자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높은 이자율 때문이다. 월지급식 상품을 이용할 경우 연 7% 이상의 이자를 매달 지급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고금리는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다. CP를 발행한 기업의 재무상태가 악화돼 부도가 나면 투자자는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다. 원금보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CP와 관련해 개인투자자의 피해가 큰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쉽고 간편한 기업자금 조달 방식

금융권 관계자는 “기업의 재무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수익만 노리고 CP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며 “기업 정보가 부족할 경우에는 이율 낮더라도 신용등급이 ‘AA’ 이상인 기업의 CP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한 투자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이 발행한 CP에 3개월씩 짧게 투자하는 방법이 그나마 CP 투자의 리스크를 덜 수 있는 방법”이라며 “고금리만 노린 섣부른 투자는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CP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킨다는 것에 있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기업이 CP를 이용해 기업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른바 ‘폭탄 돌리기’를 말하는 것이다.

CP 발행 기업은 대부분 만기가 돌아오면 같은 금액의 CP를 다시 발행해 상환한다. CP 발행한도에 제한이 없어 상환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까지 돌려막기를 하는 것이다. 증권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하는 셈이다. CP는 만기가 1년 이상이거나 특정금전신탁(금융기관이 고객의 위탁을 받아 CP 등에 투자한 뒤 운용 수익을 배당하는 상품)일 경우에만 증권신고서를 내면 된다.

이에 따라 자금난을 겪을 경우 1년 이내의 CP만 발행해 증권신고서를 내지 않아도 된다. 또한 만기와 상관없이 50매 미만으로 발행하면 사모로 인정돼 증권신고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다. 동양레저나 동양인터내셔널이 하루에 몇번씩 49억원 이하로 CP를 발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무분별한 CP 발행의 위험성은 LIG건설과 웅진홀딩스 사태에서도 드러났다. 웅진그룹은 무리한 사업다각화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웅진코웨이ㆍ웅진씽크빅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웅진그룹은 극동건설(2007), 서울저축은행(2010)을 빚을 내 인수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윤석금 회장은 웅진홀딩스 명의의 CP를 부당 발행해 1198억원을 챙기고 계열사를 불법으로 지원했다.

STX도 공격적인 M&A가 독으로 작용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ㆍ해운업계가 침체에 빠지자 STX그룹의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돼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STX 역시 부족한 자금을 CP 발행을 통해 메우려다 사태를 키웠다.
▲ 기업이 CP를 선호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투자자만 있다면 얼마든지 부족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끊이지 않는 부실기업 CP 문제

부동산 경기 침체 장기화, 미분양 누적에 따른 경영난을 이기지 못한 LIG건설도 CP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LIG그룹은 LIG건설의 법정관리 신청을 앞두고 242억2000만원의 CP를 부정발행했다가 덜미를 잡혔다.

부실기업의 CP 문제가 끊이지 않자 금융당국은 올 1월부터 전자단기사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단기자금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CP 발행 요건도 강화했다. 만기가 1년 이상이거나 특정금전신탁의 경우에도 증권신고서를 제출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CP 발행량은 줄지 않고 있다. 간단하고 편한 CP를 두고 복잡한 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발행 규모와 상관없이 증권신고서를 내도록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부실기업의 CP로 발생하는 투자자의 손실을 막기 위해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상일 한국기술대 교수는 “부실기업이 발행한 CP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며 “높은 수익률만을 노리는 투자자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CP의 문제를 알고도 규제 장치와 법안을 마련하지 않는 금융당국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강서구 기자 ksg@thescoop.co.kr | @ksg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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