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상을 줄 때도 원칙과 믿음을 지켰지만, 벌을 줄 때도 추상같이 엄격했습니다. 마치 신상필벌의 표본 같습니다. 그의 군령은 서릿발 같았고, 훈련은 실전 같았습니다. 그는 부하의 체력과 사기를 고려해 체계적으로 수군을 운용했습니다. 이순신의 신상필벌은 항상 공평무사했습니다. 지위나 인맥이 끼어 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상자와 부상자에겐 충분한 예우를 다했습니다. 이순신이 죄를 지은 부하를 처벌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냉정했습니다. 그는 백성民과 군軍을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군 혹은 관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진도대교 아래를 지나는 울돌목의 물결은 오늘도 사납습니다. 울돌목에서 펼쳐진 명량해전 당일 이순신의 기록을 지난호에 이어 소개합니다. 2척의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麾下의 배 2척에 지령하니,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기어가며 다퉈 올라갔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각기 죽을 힘을 다해서 또는 능장稜杖, 몽둥이를 잡고 혹은 긴 창을 잡고 혹은 수마석水磨石, 반들거리는 돌덩어리를 무수히 난격하였다.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힘이 다하자, 내 배가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왜군이 경상도의 오른쪽 바다라 할 수 있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날이 1597년 7월 16일입니다. 기세등등해진 왜군이 서쪽으로 진격해 오다가 명량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판옥선을 만났습니다. 칠천량해전 두달 후인 9월 16일입니다. 그 결과는 전쟁의 판도를 결정짓는 치명적인 왜군의 패배였습니다.이날 이순신이 지휘한 13척의 배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돌린 배였습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던 그때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배설이 지휘하던 배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배설의 배로 기세등등하던 왜군에
군함 5척 대 5척으로 싸운다면 서로 치고 받느라 승리한 쪽에도 피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5척대 50척이 싸울 경우, 그것도 근접전이 아닌 원거리 함포전에서는 화포가 없거나 부실한 쪽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은 이 모든 상황을 생각하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싸우기 전에 이미 이겨 놓고 싸운 셈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이런 전략을 사용하지 못한 경우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명량해전입니다. 임진왜란 초기와 달리 명량해전 당시에는 일본군도 이순신 해전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공자의 가르침인 ‘효’는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억압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달랐습니다. 그의 애틋한 효심과 가족애愛는 백성들과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장됐습니다. 「난중일기」나 「이충무공전서」에는 하루살이 같은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단호하게 처벌하는 이순신의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사랑은 군주와 국가를 향한 충성심으로도 이어졌습니다.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늦게 군사 훈련과 전쟁 준비로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