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착량묘는 작지만 정갈한 초가집이었습니다. 이후 고종 14년 1877년에 이순신의 10대손인 통제사 이규석이 기와집으로 고쳐 지었습니다. 이와 함께 호상제라는 건물을 지어 지방민의 자제를 교육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0여년 후인 1979년과 1980년에 건물이 추가돼 어엿한 서원 양식을 갖췄습니다. 매년 음력 11월 19일엔 이순신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냅니다.통영 = 삼도수군 통제영. 가배량주가 통영이 됐지만 정작 이순신은 근무한 적 없는 곳. 세병관洗兵館에 간다는 말은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에 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세병관
통영시는 통제영이 있던 도시입니다. 통영시의 일부는 한때 충무시忠武市였습니다. 충무시의 충무는 충무공忠武公에서 왔습니다. 충무 김밥의 유래도 충무시입니다. 통영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선조 39년 1606년,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습니다. 현종 4년 1663년에는 남해 충렬사와 함께 사액사당이 됐습니다. 사액사당이란 임금이 ‘현판(額)을 내린(賜)’ 사당이라는 뜻입니다. 그 후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통영 충렬사에는 유물 전시관이 부속돼 있습니다. 충렬사 유물 전시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어지럽다.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웅의 탄생을 그토록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의 리더십을 지겹도록 다시 찾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많은 독자의 요구로 시작한 ‘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의 연재를 2년여 만에 마친다. 우리는 오늘도 이순신과 같은 리더를 기다린다. 이순신은 어
임진란 유민들에게 이순신은 ‘보금자리’나 다름없었다. 백전백승하는 이순신 부대 따라다니는 게 천하 제일의 안전한 피난처였던 거다. 그만큼 적병과 토적이 천하에 가득하여 심산유곡이라도 아니 간 곳이 없었다. 이순신 부대를 찾는 유민들이 갈수록 늘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93년 10월 선조는 유성룡을 다시 영의정에 올리고, 곽재우를 성주목사로 제수해 본도
이순신의 문장저술은 모두가 슬퍼하는 정과 분개하는 의를 바로 문사에 표현하는 역량과 수완이 있어서 제갈공명의 「출사표」 또는 이영백의 「진정표」와 방출한 논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문장으로 자부하는 일은 그의 일생에 없었다. 임진년 이래로부터 7년간 전쟁에 오직 이순신에게 지우와 은애를 받은 제장들과 혜택을 입은 군민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어서 통영 여수
[CBS The Scoop] 명나라 관리 양보는 순신을 대하였다. 가만히 순신의 주사를 보니 그 세력이 무적함대라 부를 만하였다. 양보가 순신을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순신의 인격을 존경하여 마주앉기를 굳이 사양하고 손을 모으고 시립하여 서있었다. 잠시 이야기하고도 영웅을 만나보았다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순신은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기로 조정에 청하여
명나라 관리 양보는 순신을 대하였다. 가만히 순신의 주사를 보니 그 세력이 무적함대라 부를 만하였다. 양보가 순신을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순신의 인격을 존경하여 마주앉기를 굳이 사양하고 손을 모으고 시립하여 서있었다. 잠시 이야기하고도 영웅을 만나보았다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순신은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기로 조정에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좌수영은 금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