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의 비만 Exit | 살과 사랑 이야기

선선한 바람이 불고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계절이 돌아왔다. 천고마비의 계절은 운동도, 놀고 먹기에도 적합하다. 필자도 얼마 전 향우회에서 주최한 체육대회에 참가했다. 현수막이 걸리고 각 기수별 천막이 설치되는 등 초등학교 운동장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구석에선 돼지 한 마리가 긴 꼬챙이에 꿰여 빙글빙글 돌아간다. 한쪽에선 가마솥 한 가득 육개장을 끓여 낸다.
 

▲ 천고마비의 계절, 생각 없이 먹으면 살 찔 확률이 높아진다.[사진=뉴시스]

아침부터 하는 행사라 김밥ㆍ바나나ㆍ커피 등 먹을 게 즐비했다. 소중한 동문들을 한 끼니라도 거르게 할 수 없다는 주최 측의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오후엔 밴드도 올 예정이니 끝까지 즐기라는 안내방송도 나왔다. 적당한 운동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기 위한 행사가 아니라 음주가무가 보장된 야외잔치에 온 것이다. 어떻게 저런 것들을 모두 준비했을까 신기하기도 했다. ○○기라고 푯말이 붙은 천막에서는 초로의 중년들이 일찌감치 잔을 기울이고 있다.

30년 만에 만난 동창놈은 잔뜩 늙은데다 얼굴이 벌게져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취하면 공을 어떻게 찰 거냐” 물었더니 “원래 술 한잔 마시고 차는 거”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다 죽는다”고 농을 건넸더니 “마누라 땡 잡는 거지”라며 잔을 권한다.  술을 안 마시는 필자는 통상 그런 이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잠시 후 술을 전혀 못하는 샌님 같은 친구놈이 내 곁에 앉는다. 비주류가 형성되자 우리도 술판에 끼어들어 주당들의 안주를 축내기 시작한다.

모처럼 먹는 김밥도, 아침 김치도, 컵라면도 맛이 좋다. 돼지껍질을 김치에 싸서 먹는 필자에게 “다이어트 강사 맞냐”는 비아냥이 돌아온다. 다이어트 강사라고 필자의 유전자가 열량 높은 고깃 덩어리를 놔두고 오이를 집는 쪽으로 바뀌진 않는다.  잠시 후 개회식과 함께 명분상 체육대회가 시작된다. 동문 중 몇 놈은 단상 위 그늘 밑에서, 우리들은 땡볕에 서서 애국가를 부른다. 대회가 시작되면 누구는 달리고 누구는 천막 아래서 웃고 떠들고 마시며 하루가 간다.
 
후배들로 채워져 있는 옆 천막에서 고성이 들리더니 이내 주먹다짐이 오고 간다. 말릴 겸, 구경할 겸 가보니 덩치들이 산 만하여 구경만 하다 돌아온다. 남녀 선배 몇몇은 밴드 앞에 불려나가 춤을 추고 있다. 벌칙으로 30초간 춤을 추러 나온 사람들인데 30분은 출 기세다. 운동에는 관심이 없고 천지가 술판이다. 잠시 후 축구를 비롯 운동경기가 생략됐다는 방송이 나온다. 사회자 또한 앉아서 무언가를 먹으며 편하게 방송을 한다. 발 야구를 하러 온 아들은 실망하여 잔뜩 화가 났다.

축구화를 벗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필자도 먹어대기 시작한다. 아들은 누군가 지갑에서 1만원을 꺼내주자 해맑게 웃는다. 동창들을 만나 즐긴 대가일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며 늘 하던 대로 배를 쓸어보니 조짐이 좋질 않다. 하루 만에 체중이 2㎏이나 불어난 것이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매사를 어떻게 저울로 달아가며 살겠는가. 이 가을 즐기며 살자. 가끔이란 단서만 붙여서 말이다. 
박창희 다이어트 프로그래머  hankookjo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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