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 빅딜, 그 뼈아픈 성적표

▲ 과거 정부가 주도한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은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결국 무산됐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국내 시장에서는 흔치 않던 기업 자율에 의한 ‘빅딜(Big Deal)’이 성사됐다. 삼성과 한화에 의해서다. IMF 외환위기 당시 정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빅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일까.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기업 인수합병(M&A)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삼성그룹이 화학ㆍ방위산업 계열사 4곳을 한화그룹에 매각하기로 11월 26일 공식 결정했다. 인수금액만 2조원에 달하는 이른바 ‘빅딜(Big Deal)’이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진행된 대기업간 인수합병(M&A)으로는 최대 규모다. 삼성테크윈 지분 32.4%를 한화가 8400억원에 단독 인수하고, 삼성종합화학 지분 57.6%(자사주 제외)를 한화케미칼(27.6%)과 한화에너지(30.0%)가 1조600억원에 인수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로써 한화그룹은 삼성테크윈이 보유한 한국항공우주(KAI) 지분(10.0%)과 삼성탈레스 지분(50.0%), 삼성종합화학 지분 23.4%까지 넘겨받게 됐다. 최종적으로는 삼성종합화학 지분의 81.0%를 인수하게 된 셈이다. 덩달아 삼성종합화학의 자회사인 삼성토탈 지분 50.0%도 한화그룹이 갖게 됐다. 다만 삼성종합화학의 최대주주(38.4%)였던 삼성물산은 18.5%의 지분을 남겨 한화그룹과 화학분야에 관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계획이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매각은 내년 1~2월 실사와 기업결합 승인 등을 거쳐 상반기 중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이번 빅딜에 대해 삼성과 한화 양측 모두 이득을 봤다는 분석이 대부분이다. 삼성은 짐을 덜고, 한화는 힘을 얻은 것으로 보여서다. 먼저 삼성은 비주력 사업 부문을 정리하게 됐다. 삼성그룹은 최근 지배구조 재편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전자, 금융ㆍ서비스, 건설ㆍ플랜트 사업에 역량이 집중돼 있다. 삼성이 매각한 화학ㆍ방산사업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비주력 사업으로, 삼성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특히 화학ㆍ방위산업은 미국ㆍ유럽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고, 막대한 자본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지속적인 경쟁관계조차 유지하기 어렵다.

반면 방산사업이 모태인 데다가 화학분야를 꾸준히 강화해온 한화그룹은 이번 인수를 통해 주력 사업을 더 강화할 수 있게 됐다. 현재 삼성테크윈의 주력 사업은 로봇솔루션, 시큐리티 솔루션, 항공기엔진ㆍ에너지장비 사업, 전자부품 종합솔루션, 방산사업 분야다. 삼성탈레스는 구축함 전투지휘체계, 열영상 감시장비, 탐지추적장치 등 각종 군사장비의 제조ㆍ판매가 주력이다. 게다가 한화는 미래 먹거리로 로봇 무인화 사업을 육성할 계획을 갖고 있다. 한화로서는 적절한 인수가 아닐 수 없다.

▲ 과거 하이닉스는 정부가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합쳐 탄생시켰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사진=뉴시스]
한화그룹은 이번 인수를 통해 방위사업 부문 매출 규모가 약 1조원(2013년 기준)에서 약 2조6000억원으로 급증해 국내 방위산업 분야 1위 자리를 굳힐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한화는 1999년 한화에너지를 통해 정유사업 진출을 꾀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삼성토탈 인수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정부 주도 빅딜은 역효과 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빅딜의 효과를 긍정적이라 미리 점치기엔 아직 이르다. 시장의 반응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아서다. 빅딜 발표 이후 양측의 주가는 모두 하락세다. 삼성테크윈의 주가는 26일과 비교할 때 약 18%나 하락했다(11월 28일 오전 10시 기준). 한화도 대규모 자금 부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5% 가까이 떨어졌다. 신용등급도 죄다 떨어졌다. 나이스신용평가는 11월 27일 삼성테크윈과 삼성토탈, 한화에너지를 신용등급 하향검토 대상에 올렸다. 이번 빅딜에 대한 득과 실은 좀 더 지켜봐야 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이번 빅딜이 갖는 의미는 있다. 사실 빅딜은 원래 대규모 사업 부문을 ‘기업끼리’ 교환하는 걸 뜻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빅딜이 풍기는 분위기는 좀 달랐다. 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가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수단으로 이용해서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울며 겨자먹기’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스스로 결정한 전략적 결과물이다. 한화가 먼저 제안을 하자, 삼성이 더 큰 제안들을 하면서 진행됐다. 또 두 그룹의 이번 거래는 대기업들이 계열사끼리 혹은 사업부문끼리 쪼개고 붙이는 식의 ‘내부 교통정리’식 사업 재편에서 벗어났다. 시장이 향후 두 그룹의 빅딜 효과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사실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빅딜이 성사됐을 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먼저 1999년 10월 진행된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합병으로 탄생한 하이닉스를 보자.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한 설비투자가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양사의 적자 합계는 1997년 당시 3000억원에 달했다. 그러자 IMF로부터 구조조정 압박을 받고 있던 정부는 과다차입과 중복투자 등을 해소해야 한다며 빅딜을 독려했다. 당시 노동계는 “제품수명주기가 짧은 분야에서 기술방식과 생산시스템이 상이한 두 기업을 통합하는 건 위험하다”고 지적했지만 고려되지 않았다. 이후 2000년 후반부터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자 우려는 고스란히 현실이 됐다. 128메가 SD램 가격은 2000년 20달러에서 2001년 5달러대로 하락했고, 9ㆍ11사태 이후에는 1달러 이하까지 폭락했다. 결국 출범 당시 2조4000억원의 흑자를 낸 하이닉스는 이후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고, 적자는 지속됐다. 당시 전문가들은 “기업체의 덩치가 너무 커지면서 상황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해 손실을 눈덩이처럼 키운 측면이 없지 않다”며 “정부가 무턱대고 같은 업종끼리 묶었던 게 화근”이라고 지적했다.

 
재계는 지금 자발적 구조조정 중

논의만 진행됐다가 결국 무산된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도 실패한 정부 주도형 빅딜의 사례다. 주목할 것은 1999년 당시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는 똑같이 대규모 부채에 시달렸다는 거다. 각각 부채만 3조6000억원, 3조7000억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들을 서로 가져간다고 해도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서로에게 손해라는 지적도 많았다. 대우로선 현실적인 경쟁자를 하나 줄인다는 것 외에 득이 없고, 삼성으로서도 부채비율이 심각한 대우전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빅딜은 무산됐고, 삼성자동차는 프랑스 기업 르노(2000년 4월)에, 대우전자는 대우그룹과 함께 무너졌다.

이 두 사례는 빅딜이라는 게 결국 정부 등 3자의 개입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 충분히 가격협상을 진행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걸 일깨워주는 사례다. 다행히 이런 움직임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최근 군살을 빼려는 포스코와 특수강 부문을 강화하려는 세아그룹이 진행하고 있는 포스코특수강 매각작업이 대표적이다. 또 두산그룹의 두산동아 매각작업, KT의 KT렌탈 매각작업 등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와 같은 문어발 경영이 아니라 경쟁력이 약한 사업은 스스로 내려놓고, 경쟁력이 있는 사업은 더 강화하는 경영 트렌드를 보여준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느냐 여부에 초점 맞춰진 자발적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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