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라이언 일병 구하기 ③

▲ 전우애와 사랑이 싹트는 아름다운 전쟁은 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자문을 담당했던 미국의 전쟁 역사학자인 스티븐 앰브로스(Stephen Ambrose)는 전쟁이라는 인간의 행위를 전쟁의 목적이나 정치적 동기, 혹은 옳고 그름 따위의 관점이 아닌 참가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재구성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전쟁에서 자신이 총에 맞은 줄도 모르고 깨끗하면서도 우아하게 죽는 행운을 누릴 확률은 1%도 안 된다”고 증언한다. 전사자의 99% 이상이 극심한 고통과 공포 속에 죽어간다는 것이다. 앰브로스는 또 “지금까지 만들어진 전쟁영화의 전투 장면들은 너무나 깨끗하고, 표피적이며, 짧게 그려져 왔다”고 분개한다. 한마디로 영화에서 전쟁은 사실과 너무 다르다는 얘기다.

전쟁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30년 주기설’을 주장한다. 30년마다 커다란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세대의 교체 주기와 일치하는 시간 단위다. 학자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전쟁이 발생하는 건 세대가 바뀌면서 전쟁의 참상을 겪은 세대가 사라지고 전쟁의 참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새로이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 전쟁 문학, 전쟁 미술, 전쟁 영화는 세대가 바뀌어도 전쟁의 참상을 망각하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줘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거의 대다수의 전쟁 문학과 영화는 전쟁 영웅을 그려내고 이들을 미화한다. 참상을 묘사하기보다 승리를 찬미하고, 전쟁 속에 ‘꽃피는’ 전우애나 사랑 따위를 전면에 배치한다. 심지어 코미디물로 다뤄지기도 한다. 전쟁을 흥행 콘텐트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기에 급급한 것이다. 그 결과, 전쟁의 참상은 가려지고, 전쟁이라는 것은 때론 멋지고 때론 로맨틱한 ‘해볼 만한 것’ 쯤으로 인식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1970년대 말, 특히 베트남전쟁 이후 전쟁의 비인간성과 참상을 고발하는 몇편의 반전反戰 영화가 제작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거다. ‘디어 헌터(Deer Hunterㆍ1978)’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ㆍ1979)’ ‘플래툰(Platoonㆍ1986)’ 등이 바로 그런 영화들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가장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영상으로 전쟁의 ‘맨얼굴’을 담아내고 있다.

인류가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 쓰라린 전쟁을 경험한 지 5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 전쟁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전쟁의 ‘30년 주기설’에 따르면 현재 ‘위험한 시간대’를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 ‘아무도 전쟁의 끝을 보지는 못한다’는 플라톤의 예언처럼 전쟁은 끝이 없다. 사진은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투입된 군인들.[사진=더스쿠프 포토]
‘아무도 전쟁의 끝을 보지는 못한다’는 플라톤의 우울한 예언처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과 같은 크고 작은 전쟁들은 여전히 반복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은 여전히 걸핏하면 ‘불바다’ ‘피바다’ 등의 단어를 거론하며 전쟁 위협을 한다. 우리 내부에서조차 ‘전쟁을 피하려 하면 전쟁을 맞는다’며 ‘전쟁불사론’을 외치는 용감무쌍한 세력들이 존재한다. 바라건대 스필버그가 우리 앞에 들이댄 전쟁의 ‘맨얼굴’에 질겁해서라도, 그리고 그 도입부 30분간의 영상을 악몽처럼 자꾸 기억해서라도 전쟁만은 모든 사람들의 선택사항에서 영구 삭제되기를 소망한다. 
김상회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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