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76

진주성을 점령한 일본장수들은 촉석루에서 승전축하를 했다. 그때 진주기생 논개論介라는 미인이 촉석 위에서 가무하는 것을 보고 적장 중 한 사람이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논개를 잡으려 했다. 논개는 그 장수의 허리를 안고 남강 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의령 땅으로 물러난 장수들은 진주성을 구원할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서 순변사 이빈은 의병장 곽재우에게 진주성을 구하자고 했지만 곽재우의 의견은 달랐다. “작은 성으로 어찌 막강한 적을 당해내느냐. 만일에 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원조가 끊어져 함몰이 되고 말 것이다.” 군사회의 그다음 날, 적병은 의령으로 쳐들어왔다. 곽재우는 싸워보지도 않은 채 퇴각하여 달아났다. 이빈, 권율, 선거이 등도 모두 패주하여 전라도 운봉雲峰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자 진주성에 있던 창의사 김천일은 다음과 같이 다짐하고 수성守成할 기구를 준비했다. “진주성은 호남을 막아주는 병풍과 같은 곳이요, 호남은 금일 국가의 근간이니 이 성을 사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대구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이 작자는 싸우기를 무서워하여 관망만 하고 원조를 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일본 장수들은 유정의 구원병이 오기 전에 진주성을 치기로 했다. 무려 9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100여번을 싸웠지만 진주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군 장수 후등기차後藤基次(고토 모토쓰구)가 계책을 냈다. 군사 10여명의 몸을 생우피生牛皮로 싼 후 진주성으로 돌진해 쇠갈고리로 성돌을 빼내기로 했다. 성 위에 도사리고 있는 조선군이 제 아무리 끓는 물을 내리부어도 생우피를 입은 적병에겐 효력이 없었다. 그렇게 성돌이 빠지자 여름철 장마로 물에 젖은 성벽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성 안으로 성난 파도처럼 돌진하였다.

제2차 진주성 대첩의 참패


그 결과, 성 안에 있던 1만여명 군사와 4만여의 백성이 함몰되었다. 김천일ㆍ최경회 등 여러 장수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북향사배하고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절사하였다(1593년 6월 20~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을 점령한 일본장수들은 촉석루에서 승전축하를 했다. 그때 진주기생 논개論介라는 미인이 촉석 위에서 가무하는 것을 보고 적장 중 한 사람이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논개를 잡으려 했다. 논개는 그 장수의 허리를 안고 남강 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논개란 관기는 본래 전라도 장수현 사람이다. 장수현에는 옥녀봉玉女峯이란 산이 있는데, 산봉우리가 수려하여 풍수 보는 사람이 “이 산 아래에 절대명주絶代名姝가 날 것이다”고 했다. 그 옥녀봉 아래에서 태어난 이가 논개다. 재주와 용모, 그리고 가무가 매우 뛰어났다. 어느 날 연회석상에서 창의사 김천일이 논개에게 “나의 수성하는 방략이 김시민과 비교했을 때 어떠하냐”고 물었다. 논개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군심軍心이 통일되지 못한 점으로 보아 김시민에겐 미치지 못할 겁니다.” 화가 치밀어오른 김천일이 노하여 논개를 베려 했지만 그 재모를 아껴 용서했다. 아마도 논개는 그날 냉소를 했으리라. 급기야 성이 함락된 뒤 낙화가 되어 아름다운 이름을 만고에 남겼다.
▲ 소맹선 1척을 상실하고도 표문을 올려 벌을 기다린 이순신의 태도에 사람들이 감복을 하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1592년 4월 전란이 발발한 이후 1년 동안 좌수사 이순신은 자기의 본영 창고에 별도로 보관해 놓은 정미 500석을 사용하지 않았다. 부하 제장들이 의심이 나서 그 용처를 물어보자 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신하된 우리는 충성이 부족하여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성상이 파천하시어 방금 용만에 머무르셨다. 만일에 평양에 있는 적군이 의주를 범한다 하면 대가는 장차 바다를 건너실지라. 그러하므로 나의 책임은 용주(임금을 태운 배)를 준비하여 서해로 가서 호위하는 것이다. 황천皇天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아니하면 우리 신하 된 자는 힘을 다하여 회복을 도모할 것이요, 비록 불행할 지라도 군신이 내 나라 땅에서 함께 사직에 죽는 것이 옳지 않느냐?”

제장들이 이 말을 듣고 감복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지난번 웅천 싸움에서 이순신의 배 1척이 침몰했다. 대부분의 군사는 헤엄쳐서 다른 배에 올랐지만 2~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배는 건질 수 없게 되었다. 순신이 개전한 후 수십 회의 격전을 치렀는데, 이처럼 병선을 잃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흥미롭게도 순신은 이 죄를 엄히 물어달라며, 표문을 올리고 사죄했다. 그 표문의 내용을 보자.

순신의 말에 감복한 제장들

臣本無狀 叨守重寄 日夜憂懼 思報涓埃之效 幸賴皇天之佑 屢獲勝捷 領下之士卒 驕氣日增 爭首突戰 惟恐居後 故臣居嘗飭諭 以輕敵必敗之理 然猶此不戒 至使一隻統船 終至傾覆沈沒 此臣之用兵不愼 指揮乖方之致 極爲惶恐 伏藁待罪
변변찮은 신이 외람되게 중책을 맡아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티끌만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였더니… 다행히 하늘이 도우시어 여러번 승첩하였습니다. 거느린 군사들이 (승첩한 기세를 타서) 날로 교만해져 앞을 다투어 돌격하여 신이 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한다는 이치로 타일렀습니다만. 오히려 조심하지 않고 마침내 통선 1척을 전복 침몰시켰습니다. 이는 신이 용병을 삼가지 못하고 지휘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황공하여 복고대죄(거적에 엎드려 처벌을 기다리는 것)합니다.

이런 이순신의 태도를 보고 식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원균은 전쟁 초에 74척의 병선과 1만여명 장졸을 일시에 잃어버리고도 부끄러운 태도가 없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사소한 소맹선 1척을 상실하고도 표문을 올려 벌을 기다리기까지 하니, 그를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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