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의 프리즘 |국제 금융시장의 ATM, 한국

▲ '원화 국제화'의 리스크가 있다고 손을 놓으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대외변수 취약국에 머무를 것이다.[사진=뉴시스]
한국경제만큼 대외변수에 취약한 곳도 드물다. 그전에는 미국이 기침하면 감기에 걸렸는데, 요즘은 중국이 재채기만 해도 몸살이 난다. 이런 판에 중국 경제의 성장세가 꺾이고 미국이 금리를 올릴 거라는 예상이 겹치며 ‘9월 위기설’이 나돌자 외국인 투자자금이 대거 빠져나가며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졌다. 위기설 여파로 원화가치가 급락(환율은 급등)하면 헤지펀드들이 환차손을 피하려고 주식을 거침없이 팔아치운다. 한국에 투자해 이익을 내봤자 환율이 오르면 달러로 바꾸는데 손실이 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돈 원화가 국제 결제통화로서 경쟁력이 없는 탓에 위기설이 퍼질 때마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오죽하면 한국을 ‘국제 금융시장의 ATM’(현금인출기)이라 부를까. 헤지펀드 등 외화 유출입이 빈번하면 그만큼 환율이 급변동하며 불안해진다. 자본시장은 완전 개방됐는데 원화는 국제적으로 거래가 안 되니 달러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결국 환율 변동성을 줄이는 방법은 무역과 자본 거래에서 원화 결제 비중을 높이는 데서 찾아야 한다. 국제 자본시장에서 달러가 아닌 원화표시 채권도 발행해 돈을 빌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원화의 국제화’다.

외국에서 원화로 물건을 사고 수출대금을 원화로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들은 환전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수출입 기업들은 환위험을 떨쳐낼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처럼 국내 경제 상황은 괜찮은데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을 받는 일도 줄어든다. 정부가 원화 국제화를 처음 거론한 것은 27년 전인 1988년. 개발도상국 지위를 벗어나 외환거래에 제한을 두지 않는 IMF(국제통화기금) 8조국 의무를 이행하면서다. 1993년 3단계 금융자율화 및 시장개방 계획을 발표하면서 원화 국제화 방안도 내놨지만 정부 스스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원화의 공신력을 인정받기 쉽지 않을뿐더러 작은 규모의 외환시장이 투기꾼들의 공격을 받아 환율이 더 요동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선 관료집단의 무사안일,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의 반목, 정치권의 무관심도 작용했다.
그새 상황이 변했다. 기업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나라밖 지출과 국제거래도 활발하다. 경제의 글로벌화가 가속화면서 연간 교역규모가 1조 달러를 넘어섰다. 유럽 재정ㆍ금융위기 이후 우리 경제와 기업의 신인도가 상승하면서 한국 채권의 인기도 높아졌다. 일본 엔화는 이미 국제화가 상당히 진전됐고, 중국 위안화도 국제화 반열에 올라섰다. 미적대다간 한ㆍ중ㆍ일 삼국 통화전쟁에서 밀려날 것이다.

물론 느닷없이 달러화처럼 기축통화 대접을 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범위에서 단계적으로 원화 사용을 늘려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전 세계를 목표로 하기보다 아시아 역내 무역 및 서비스 결제 화폐로 출발할 수도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도 원화가 국제무대에 바로 서야 효과가 커진다.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데 머물지 말고 원화와 현지 통화를 맞바꾸는 통화스와프 계약을 확대 체결하자. 한류 열기가 뜨거운 나라에서 한류 상품을 구입할 때 원화결제를 유도하는 방법도 있다.

수출 기준 세계 6위, 국민총생산 기준 13위인데 원화의 위상은 바닥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격’을 중시하며 ‘창조경제’를 국정과제로 내세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취임하면서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했다. 원화 국제화는 역대 정권에서 가지 못한 길이다. 리스크가 있다고 손 놓고 있으면 영원히 대외변수 취약국에서 졸업하지 못한다. 경제력에 걸맞은 원화의 국제화야말로 국격도 높이고 창조금융으로 가는 양수겸장이다. 박 대통령과 최 부총리가 적극 나서야 할 이유다.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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