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정주영 현대 창업자

▲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자는 무한한 도전정신으로 현대를 창업, 한국 재계 선두 기업으로 일궈냈고, 말년엔 정치와 북한ㆍ러시아 사업에도 손을 대 20세기 한국 경제사에 보기 드문 족적을 남겼다.[사진=뉴시스]
오는 11월 25일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 창업자가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15년 전인 2001년 3월 86세를 일기로 타계한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그는 무한한 도전정신으로 현대를 창업, 한국 재계 선두 기업군으로 일궈냈다. 말년엔 정치와 북한ㆍ러시아 사업에도 손을 댔던 그는 20세기 한국 경제사에 보기 드문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요즘 현대 창업자인 고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이하 정주영 회장)을 재조명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그의 업적과 기업 철학을 되새겨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다. 정 회장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한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지금의 답답한 경제 현실이 깔려있다. 오래도록 저성장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한국경제를 구출해낼 사람이나 방법을 찾다보니 ‘정주영  리더십’ 대망론待望論이 부상했다고나 할까. 지금이야말로 긍정과 도전정신, 창의성을 골자로 한 ‘정주영 리더십’이 환생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사실 한국경제 발전의 DNA였던 역동성과 왕성한 기업가 정신이 박물관으로 들어간 지는 제법 됐다. 성장을 통해 파이를 더 키우자는 주장보다 내 몫 챙기기와 분배ㆍ복지 정의가 더 설득력을 얻는 세태를 헤치고 나갈 경륜 있는 리더도 잘 안 보인다.

기업인들은 새로운 성장 동력 찾기보다 현상 유지와 대중의 눈치 살피기에 더 매달리는 분위기다. 창업 2ㆍ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정주영 리더십’이 기업인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건 아니다. 일반 대중의 경제 의식이나 경제 행위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정 회장의 86년 인생 중 기업인 이력은 대개 60년쯤 된다(그래픽 참조). 1940년 자동차 수리점 아도(Art)서비스 인수 운영부터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현대를 직접 키운 시기로 볼 수 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하고 후선으로 물러난 다음부터는 현대와 우리나라 전체에 필요한 큰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정치인으로 산 것은 2년 정도에 불과했다.

인생 마지막 8년(1993~2000년) 동안에도 그는 정ㆍ재계를 넘나들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두 차례의 소떼 방북(1998년)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의 경협 논의, 금강산 관광단지 개장에 따른 대북 사업 착수(1999년) 등이 그것이다.

그는 통상의 기업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길을 걸었다. 거침이 없었다고나 할까. 당시 금기시됐던 북한을 넘나들었고, 시베리아 개발을 명분으로 수교 전 옛 소련을 왔다 갔다 했다.

“이봐, 해봤어?” 이 말은 ‘정주영 리더십’의 핵심 키워드다. 무한한 긍정 마인드와 무無에서 유有를 개척해낸 도전정신, 실패를 상쇄하고도 남는 창의성 등을 함축해서 표현한 말이다. 그동안 정 회장의 업적과 기업 철학에 대한 연구는 봇물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 여러 가지 일화와 리더십 특성이 소개됐다.

대개 ‘긍정과 도전정신, 창의성’을 골자로 해서 ‘국가사회 기여’란 덕목을 보탠다. ‘아산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정홍원)’의 경우는 ‘불굴의 개척자 정주영’이란 타이틀을 달고 그를 기리고 나섰다.

그의 기업가 정신의 핵심인 ‘도전정신’을 뒷받침하는 일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추려서 소개해 본다. 전쟁 중이던 1952년(37세), 부산 UN군 묘지 단장 공사 수주에 얽힌 일화다. 당시는 한겨울이었는데도 미군 측은 묘지를 푸른 잔디로 단장한다는 조건을 달아 입찰에 부쳤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방한해 묘지를 둘러본다는 이유에서였다. 누가 봐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정 회장은 며칠 뒤 여러 대의 트럭에 새파랗게 자란 보리를 실어와 묘지를 단장하는 방식으로 이 일을 성사시킨다.

저성장이 일깨워준 ‘정주영 리더십’

다음은 1971년(56세) 국내 기업들이 막 중공업에 뛰어들기 시작할 무렵의 일화다. 당시 그는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를 들고 유럽 차관을 얻으러 다녔다. 조선소를 짓기 위해서였다. 거듭된 실패 끝에 당시 영국 바클레이 은행에 영향력이 컸던 찰스 롱바텀 회장을 만나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 주며 설득,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1984년(69세) 서산방조제 물막이 공사에 얽힌 일화도 있다. 당시 초속 8m의 빠른 물살로 인해 마지막 300m 구간을 남겨두고 공사가 멈춰 버렸다. 그는 해체해서 쓰려고 사뒀던 폐유조선(길이 322m)을 끌고와 해당 구간을 틀어막은 채 공사를 끝내 국내외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1989년엔 옛 소련과 북한을 차례로 방문, 시베리아 개발 등을 논의하고 왔다. 소련은 수교 전이었고, 북한은 금기시된 적지敵地였다. 경제인으로서 첫 행보를 했던 당시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시베리아 가스와 삼림자원 개발을 통해 북한과 사업적으로 엮으려 했던 그의 원대한 구상은 미완 상태로 남아 있긴 하다.

그의 불굴의 도전정신이 극적으로 드러난 일화는 또 있다. 1992년(77세) 당시 그는 그룹 경영을 동생 정세영 회장과 전문경영인 이명박 사장 등에게 맡기고 정계에 투신한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3위로 낙선하지만 선거 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경부고속도로를 2층으로 만들겠다” “반값 아파트를 공급하겠다”는 등의 구호가 떠오른다.

 
1998년(83세) 그는 한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창의적인 이벤트를 또 연출한다. 소떼(통일 소)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두 차례 방북 길에 오른 것이다. 6월에 500마리, 10월에 501마리를 몰고 가는 이벤트는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김정일과 경협을 논의했고, 나아가 금강산 관광사업의 물꼬를 텄다.

정 회장은 여러 곳에서 ‘존경하는 한국 부자’ 1위로 뽑힌 적이 있다. 모 경제지가 최근 조사한 결과를 보면 1위 정주영 회장(복수응답 포함 43.4%), 2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33.8%), 3위 김범수 카카오 의장(25%)이었다. 서민 풍모와 역경 극복의 화신化身이란 점 때문으로 분석됐다. 스스로를 “그저 부유한 노동자에  불과하다”며 살았던 그는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한국 정ㆍ재계를 아우르는 높은 경지까지를 살아낸, 20세기 한국이 낳은 풍운아였다.

지난 8월엔 그의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우표가 발행됐고, 오는 11월엔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치러진다. 11월 18~24일 기념음악회, 학술 심포지엄, 사진전, 기념식 등이 잇따라 계획돼 있다. ‘한국 재계의 거목巨木 정주영.’ 15년 전에 그는 갔지만 어쩐지 우리는 아직 그를 떠나보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태원 더스쿠프 대기자 iexlov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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