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88)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집에서 산다더라.” “유민에게 거처를 주고 해왕 노릇을 한다더라.” “조정의 처분을 듣기도 전에 논공행상을 맘대로 한다더라.” 비변사 부제조 황신은 이순신에 대해 이런 말을 들어 왔다. 하지만 한산도에서 만난 순신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 소문과 달리 이순신의 거처는 검소해 사졸의 거처와 다름이 없었다. 시기와 당파 싸움이 영웅의 모습을 비틀어 놓은 것이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이 거제도 동단에 있는 일본군의 소굴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보고를 받은 소서행장은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이에 따라 가등청정을 거짓으로 내세운 글을 모사 요시라를 시켜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냈다. 이 밀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본이 다시 출병한 건 주전파인 가등청정의 주장 때문이다. 애당초 강화를 주장하는 우리는 가등청정을 원수로 본다. 그래서 조선 장수의 손을 빌려 가등청정을 죽이려 한다. 조선 측에서 수군 명장 이순신을 보내 가등청정이 나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면 우리가 가등청정이 탄 병선을 가르쳐 주겠다. 그러면 백전백승하는 이순신의 전략 수완으로 가등청정을 베도록 하라. 가등청정이 비록 웅맹하나 이순신의 상대는 못 된다. 가등청정만 죽으면 주전파가 몰락해 양국의 강화가 성립되고, 우리 수십만의 원정군은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요시라는 일본 군중의 주화론자 소서행장의 부하다. 조선어를 잘해서 김응서는 그를 환영하였다. 요시라는 소서행장의 서신을 전한 뒤 김응서에게 “가등청정이 대군을 거느리고 1월 7일 나올 예정이니 이순신이 중로에서 쳐 사로잡게 하시오. 두 나라가 다시 싸우지 아니하고 무사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전부터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을 재주 있게 꾸며 말한 것이었다.

시기 많고 어리석고 무식하며 허영심이 가득한 김응서는 이 말을 믿었다. 뇌물도 많이 받아서 대구에 머무르고 있던 도원수 권율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권율도 요시라가 꾸며 댄 말에 속아 넘어가 그 사정을 조정에 알렸다. 조선 장수란 멍텅구리 노릇만 한 셈이었다.
선조는 권율의 장계를 보고 비변사 제신들에게 물었다.

이때는 유성룡의 세력이 떨어지고 서인 북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였다. 몇해 동안 전쟁이 쉰 틈을 타고 당쟁이 들불 일듯 일어났다. 밤낮으로 꼬투리와 허물을 찾아내 “죽여야 한다” “베어야 한다” 하는 명분론만 주고받았다. 당연히 경국지책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 일본 풍신수길이 조선에 보낸 군사의 수는 10만명이 훌쩍 넘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해평부원군 우찬성 윤근수는 “이순신을 시켜 가등청정을 잡을 좋은 기회가 왔소”라며 권율이 진언한 내용대로 하기를 주장하였다. 황신의 의견은 달랐다.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두 사람이 비록 틈이 있다 하나 그놈들이 자신들 나라를 위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오. 들은즉 가등청정이 이순신을 무서워한다 하니 서로 짜고 이런 밀고를 했을지 알 수 없소. 자고로 기모와 비책이 적장으로부터 나와서 성공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황신은 일본에 오래 있어 봐서 적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래부터 명민하고 담략이 있었다. 미관말직인 문학文學에 있던 그를 유성룡이 특별히 천거하여 접반사니 통신사니 하는 외교 방면으로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당시 직책은 비변사 부제조副提調였다.

선조는 영의정 유성룡을 돌아보며 황신의 말이 옳은 것 같다 하였다. 유성룡은 가부를 말하지 아니하고 끄떡일 뿐이었다. 유성룡은 자신이 이순신을 두둔하면 당쟁이 일 게 뻔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자기의 지위가 바람 앞의 촛불인 것을 자각한 까닭이기도 하였지만 혹자는 그 침묵을 이렇게 묘사했다.

“유정승의 침은 종기를 다스리는 특효약이다.” 종기를 없앨 때는 오래 말을 하지 않고 만든 침을 발랐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비변사 부제조 황신을 삼도수군 위유사慰諭使로 삼아 은밀히 이순신에게 보내 그 내막을 알아 오게 하였다. 이미 정탐을 풀어 놓은 이순신은 풍신수길의 처조카인 소조천수추를 총대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좌우 선봉으로 삼은 15만 대군이 바다를 건넌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그래서 순신은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장졸과 백성 가운데 겁을 내는 이는 없었다. 이순신의 용략으로 ‘전필승戰必勝 공필취功必取’할 것을 굳게 믿고 있던 터였다. 임진년 이래 6년 동안 이순신의 지모, 수완, 인격을 체험한 장졸과 백성은 이순신과 사생死生을 함께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황신이 위유사로 한산도에 이르매 이순신은 성대한 의식을 차려서 환영하였다. 위유사란 뜻은 왕명을 대표하여 바닷가에서 고생하는 삼남 장사들의 노역을 위문하는 사절이었다. 황신은 순신을 처음 보았다. 그 명성은 일본에 있을 때부터 많이 들었다. 풍채의 장대함, 자태의 단아함을 보고 문무겸전인 것을 알아차렸다. 자연스럽게 경모하는 정이 간절하였다. 더욱이 황신은 수백척 병선에 6만 정예의 사졸이 정숙정제하게 자기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꿈의 세상에나 온 것이 아닌가 하였다.

시기로 비틀어진 순신의 모습

그는 한양에서 이순신에 대해 이런 말을 들어 왔다.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제승당과 운주각運籌閣이란 집을 짓고 왕공과 같은 호화로운 거처에서 행동을 한다더라. 100만명의 유민을 편안히 살 곳을 정해 주어 삼도의 해왕 노릇도 한다. 조정의 처분을 듣기도 전에 자기 마음대로 논공행상을 하여 사사로운 정을 쓰고, 전공이 많은 원균을 배척하였다.”

하지만 참언일 뿐이었다. 한산도에 와서 보니 순신의 거처는 검소하여 사졸의 거처와 다름이 없었다. 황신은 그 참언의 출처가 외려 궁금해졌다. 아마도 원균, 이일, 김응서, 권율, 윤근수, 이산해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시기심과 당파 싸움에서 영웅을 비틀어 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탄식하면서 영웅을 위하여 눈물을 뿌렸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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