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국제시장 ❷

▲ 어린 덕수는 부실한 국가 때문에 소년 가장이 됐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덕수(황정민)의 일가는 북한을 탈출하려는 30만명의 피난민 속에서 아비규환을 겪는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부에 그토록 ‘친애하는 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어떠한 요청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흥남철수작전을 책임진 미군 10군단 사령관 알몬드(Almond) 장군이 통역관이었던 현봉학의 애원에 실로 놀라운 인도주의 정신을 발휘했을 뿐이다. 미군의 무기와 군장비 600만t을 바다에 버리고 대신 9만여명의 피난민을 태워 부산항으로 철수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국민의 생명’보다는 ‘국가의 생명’이 우선이었던 셈이다.

흥남부두에서 아버지(정진영)와 여동생 막순이(최 스텔라 김)를 잃은 덕수는 낯설고 물선 부산 국제시장에서 구두닦이 생활로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한다. 미군이 던져준 초콜릿을 시장통 형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시장을 질주한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표범에게 쫓기는 가젤처럼 필사적이다. 결국 붙잡혀서 죽도록 얻어터지면서도 초콜릿을 빼앗기지 않고 입안에 욱여넣는다. 일본 헌병에게 붙잡힌 독립투사가 독립군 암호문을 입안에 넣고 삼켜버리는 것과 같은 결기다. 국가의 법이 무너진 공간은 약육강식의 아프리카 초원과 다름없다. 

1970년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 전태일은 ‘덕수 또래’ 어린노동자들을 약육강식의 무법지대에 방치한 국가에 분노했다. 전태일은 온몸에 불을 붙이고 청계천 시장을 뛰어가며 ‘어린 동심을 보호하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1950년대 부산 국제시장은 수많은 전태일이 국가에 분노하고 분신할 만한 상황이었겠지만 어느 누구도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덕수는 줄줄이 딸린 동생들 학비를 벌기 위해 서독 탄광으로 달려간다. 면접 당시 마뜩지 않아하는 면접관 앞에서 덕수는 느닷없이 면접장에 있던 국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힘차게 부른다. 단순히 면접통과를 위한 순발력 있는 기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덕수의 눈빛과 목소리에 묻어나는 애국심이 절절하다. 부실한 국가 탓에 덕수가 생이별을 했고, 가족을 찾아줘야 할 국가가 의무를 방기했음에도 말이다.

덕수는 국가에 대한 분노 대신 자신처럼 ‘소녀가장’으로 독일 노인들의 ‘똥수발’을 들고 시체를 닦는 파독 간호사 영자와 사랑을 키워간다. 시간이 흘러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으로 입양 간 여동생 막순이를 겨우 찾은 덕수는 이번에도 ‘KBS 만세!’가 아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다.

▲ 파독 광부를 자원한 덕수는 애국심이 투철하다는 이유로 합격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조선시대 선비의 표상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진다니 눈물겨워 하노라”면서 임금과 종묘사직에 대한 충절을 읊은 바 있다. 아무런 혜택이나 권리를 누리지 못해도 도리와 의무에 소홀함이 없다는 거다. 그 정신을 이어받았는지 덕수도 애국심이 철철 넘친다.

하지만 덕수로 상징되는 아버지 세대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애국심 덕분이자 부작용일까. 국민의 무한한 애국심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올랐는데 정작 많은 국민들은 불행하다. 금과옥조처럼 여겨졌던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이라는 가르침, 아랫목이 따뜻하면 윗목도 자연히 따뜻해진다는 소위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자신의 국민의 당연한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지 않으면 국가도 그 권리를 존중해주거나 보호해주지 않는다. 애국심은 분명 미덕이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애국심까지 미덕은 아니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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