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일의 다르게 보는 경영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행보가 주목을 끌고 있다. 어느덧 반 총장은 ‘새로운 대통령 후보’라는 닉네임까지 얻은 듯하다. 한국 최초의 UN 사무총장이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물론 여야의 평가는 엇갈린다. 반 총장이 ‘친박親朴 후보’라는 소리를 듣자 여권은 찬양을, 야권은 비난을 입에 담는다.

▲ 2016년 한국은 새로운 인물을 원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도 그랬다. 사진은 김우중 전 회장(왼쪽)과 반기문 UN 사무총장.[사진=뉴시스]
기성 정치인이 아니면서도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 반 총장을 보면서 필자(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반기문과 김우중. 각기 다른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대통령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 건 두 이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출마의 변辯을 확고하게 밝힌 김 전 회장은 타의에 의해 날개가 꺾였고, 출마의 변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은 반 총장의 행보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김 전 회장의 대통령 출마 의지는 어느 정도였을까. 또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 1987년 ‘장충체육관 대통령’ 전두환의 후계자로 노태우가 낙점을 받았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헌정 사상 최초로 직선으로 치러졌지만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는 어렵지 않게 대통령에 올랐다.

권력을 잡은 노태우는 전임 대통령들이 하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통치자금을 받기 위해 재벌들을 길들이기 시작한 거다. 정부가 재벌그룹의 주력 업종을 직접 배정, 비주력업종과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하도록 압박한 건 대표적 사례다. 만약 기한 내 비주력업종 및 비업무용 부동산을 처분하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이자와 세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이런 작업에 김 전 회장은 신물을 냈다. 군인 대통령이 아니라 경제 대통령이 나와야 된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깨달았다. 정권의 지나친 간섭을 끊고 자유시장의 기업 풍토를 만들기 위해선 기업인의 정치 참여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1992년 북한의 남포공단을 개발하기 위해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김 전 회장은 비밀리에 대우그룹 임원들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불렀다. 여기서 그는 대통령 출마의 변을 설파했다. 출사표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 정권의 간섭이 진절머리 난다.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기업경영의 새 시대를 열어야 미래가 보일 것이다.”

필자는 당시 유력후보별 지지세력을 분석해 봤다. 김 전 회장은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의 맥을 형성하고 있는 경기고·연세대 출신이었다. 특히 그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은 전국민적 공감대를 불러일으켰고, 김 전 회장은 대학생의 롤모델이 됐다. 하지만 출마선언 후 귀국한 그와 대우그룹엔 엄청난 압력이 밀려들었다. YS를 후계자로 영입하며 정권 연장을 꾀하고 있던 민자당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제3의 후보를 막아서야 했다. 이를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YS 승부수가 통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청와대는 직간접적으로 김 전 회장에게 후보 사퇴 압력을 넣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부는 비공개 세무조사라는 초강수를 뒀다. 보름간의 세무조사 결과, 700여억원의 추징액이 결정됐고, 정부는 김 전 회장이 후보사퇴를 하지 않는다면 이를 추징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대우그룹의 붕괴를 원치 않았던 그는 결국 사퇴를 발표했다. 만일 그때 김 전 회장이 사퇴하지 않고 대통령에 올랐다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반 총장의 행보가 그때 김 전 회장과 오버랩되는 건 바로 이런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김우일 대우M&A 대표 wikimokg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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