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 할머니와 함께 팔아보니 …

▲ 통신소비자협동조합이 문을 연 휴대전화 판매점 ‘통구(Tong9)’에서는 저렴한 요금제로 스마트폰을 이용할 수 있다.[사진=지정훈 기자]
“1년 가까이 일하면서 민원 고객이 한명도 없었어요. 오다가다 빵 같은 간식을 주고 가는 고객도 많구요.” 내년이면 칠순을 맞는 박영자 할머니는 휴대전화 판매 상담원을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그의 주 임무는 휴대전화 통신요금을 낮춰주는 것이다. 박영자 할머니와 상담석에 앉아봤다.

9월 20일 오전 10시, 인천지하철 1호선 예술회관역.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나는 계단을 따라 올라서자 왼쪽에 ‘통구(Tong9)’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느낌이 들었다. 휴대전화 판매점에는 으레 이동통신사의 로고가 달려 있게 마련인데, 여기엔 ‘어르신 통신비 내려드리기 운동’이라는 현수막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이 매장을 운영하는 통신소비자협동조합의 이용구 상임이사는 “여기는 소비자를 위한 휴대전화 매장”이라고 말했다. 안이 훤히 보이는 매장 안에는 이용구 이사와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 상담원 4명이 앉아있었다. 인사를 건네자 매장에 있는 어르신들이 기자를 환대했다. “곧 사람이 몰릴 텐데 앉아 계세요.”

금방 첫 손님이 방문했다. 지인의 소개로 왔다는 할아버지였다. 올해 69세의 박영자 할머니가 상담석에 앉아 응대했다. 무표정으로 상담을 받던 할아버지는 매달 1만1000원을 내고 있는 기본요금을 1500원으로 내릴 수 있다는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휴대전화 단말기를 바꿔야 하거나 통신사를 옮겨야 하는 건가요?”

박영자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번호도, 휴대전화도 바꿀 필요 없어요. 쓰던 거 그대로 그냥 쓰면 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고객의 물음에 박영자 할머니는 비결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농산물과 공산품도 도매가격과 소비자가격이 있듯이, 통신 서비스도 도매와 소매가 있어요. 우리 가게는 쉽게 말해 도매가로 파는 거죠.”

뒤이어 찾은 고객은 중년 여성이었다. 고객이 자리에 앉자 박 할머니는 이렇게 물었다. “휴대전화 요금 내리려고 오셨어요?” 다른 휴대전화 매장에 가면 열이면 열 “휴대전화 바꾸러 오셨어요?”라고 묻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질문이다. 옆에 있던 이 이사는 “이게 우리 매장의 첫 응대 멘트”라고 말했다.

박영자 할머니는 고객이 사용하는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최근 두달 간의 요금과 통화 패턴을 물었다. 이 고객은 매달 3만~4만원 수준의 요금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사용하는 데이터량은 월 100MB, 통화량도 많아야 월 10분가량에 불과했다. 통신소비자협동조합의 요금제를 적용하면 6000원의 요금으로도 이용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고객은 요금이 줄어드는 과정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문제는 이 고객이 요금제를 약정 계약했다는 점. 그래서 요금제를 변경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박영자 할머니는 약정이 끝나고 다시 방문할 것을 권유했다. 위약금 수준이 7만원을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객은 완강했다. “그냥 지금 바꿔주세요. 찜찜해서 이 요금제를 쓰고 싶지가 않네요.”

통신요금을 도매가격으로 …

놀랍게도 뒤이어 찾은 두 손님 역시 위약금이 걸려 있었지만,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한 고객은 10만원이 훌쩍 넘는 위약금을 당장 내야했지만 요금제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분들이 자주 오시나봐요?” 기자가 묻자 박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마세요. 고객이 돈 조금이라도 덜 낼 수 있게 계약기간 이후에 바꾸라고 해도 본인들이 답답하다고 그냥 바꾸고 가는 분들이 많아요. 지금까지 사기를 당한 기분이라면서.”

이후에도 많은 고객이 오고갔다. 손주랑 메시지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하고 싶다고 찾아온 고객도 있었다. 부모님 휴대전화를 바꾸고 싶다는 젊은 남성도, 이통사의 패키지 통신요금이 부담된다는 대학생도 모두 박영자 할머니의 고객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숨을 돌려 대화를 나눴다.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박영자 할머니는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힘이 나요. 특히 우리 같은 노년층한테 스마트폰은 공포나 다름없거든요. 일단 휴대전화 매장에 들어서는 것부터 겁이 나요. 공짜다, 무료다, 혜택이 많다 해서 들어가면 제대로 설명도 없이 사인하라는 대로 사인하고 휴대전화를 사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한달 뒤에 고지서가 나오면 놀란 자식들한테 전화가 오곤 했죠. 우리가 통신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턱이 있나요. 하지만 알고 난 뒤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분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다른 분들한테 알려주는 게 참 좋아요.”

▲ 통신소비자협동조합은 휴대전화를 파는 것 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을 위한 맞춤형 스마트폰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사진=지정훈 기자]
내년이면 팔순이라는 조석렬 할아버지는 기사에 꼭 담아달라며 말을 꺼냈다. “통신 시장이라는 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참 소비자한테 불리하게 돼 있다는 걸 느껴요. 비슷한 서비스가 너무 많고, 불필요한 요금도 너무 많이 붙죠. 그럴수록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리고 고객에게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 해요. 이미 스마트폰 없이는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됐잖아요.”

점심시간이 끝나자 불그죽죽 성난 얼굴의 고객이 매장을 찾았다. “나 사기당했어요. 1만~2만원씩 내던 요금이 4만원으로 뛰었지 뭡니까.” 박영자 할머니가 요금이 뛴 이유를 알아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약정 기간이 끝나면서 약정 할인도 끝났기 때문이다. “그럼 기간이 끝났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던가, 완전 사기잖아요. 저 이 요금 못 낸다고 통신사에 전해주시겠어요?” 박영자 할머니는 고객의 성난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상담을 진행했다.

자식들이 본인의 통신비를 내는 게 부담스럽다는 고객에게는 농도 던졌다. “이번에 아낀 통신비 만큼 자식들한테 용돈 더 챙겨달라고 하세요.” 가장 흥미로운 건 박영자 할머니와 조석렬 할아버지가 찾아온 이들을 꼭 ‘고객’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통신사용 패턴을 분석했을 때, 합리적인 요금제를 쓰고 있다면 그냥 돌려보냈다.

노인 일자리 만드는 통신 산업

이 매장의 역할은 단순히 휴대전화를 팔거나 요금을 바꾸는 게 다가 아니다. 한쪽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삼삼오오 모여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용구 이사의 말을 들어보자. “이거 배우겠다고 멀리 방배동에서 오시는 분도 계세요. 스마트폰 사용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있고 방송도 있지만 아무래도 어르신들은 어르신들끼리만 통하는 대화가 있어서 그런지 굳이 이곳까지 오시더라구요. 우리 매장만의 AS 서비스인 셈이죠.”

해가 질 무렵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사이 찾아온 고객만 20명이 넘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대형 이동통신사의 직영점과 마주쳤다. 매장 벽에는 ‘공짜’라는 팻말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어요, 다 할아버지 속이려고 그러는거지”라며 진지한 목소리로 상담하던 박영자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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