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정씨 여성경제학

▲ 21세기 사회는 남성과 여성이 공존해야 한다.[사진=아이클릭아트]
국부國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소유했던 해남윤씨 가문의 재산증식 비결은 무엇일까. 일종의 재산 상속문서로 불리는 분재기를 보면 아들 딸 차별하지 않고 재산을 똑같이 나눠주는 재산상속 시스템 덕을 톡톡히 본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근검절약과 적선을 강조하는 가풍이 더해져 500년 가까이 호남 최고의 부자로 군림했다.

조선 초 한반도 남쪽 끝 풍광 좋은 전남 해남에 터를 잡았던 윤효정은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가이자 부호인 해남정씨 정호장 가문에 장가를 가게 되어 처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고려시대에서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아들과 딸이 부모로부터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17세기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남녀균분의 원칙이 무너지고, 장자상속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남윤씨 가문은 제사 봉양을 명분으로 맏아들에게 집중적으로 재산을 물려준다. 해남윤씨 가문은 처가에게 받은 재산으로 큰 부자가 되었고, 이를 맏아들에게 대부분 물려줘 재산을 보존했다는 얘기다. 막상 큰 재산을 물려줬던 해남정씨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위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집안을 건사하지 못했다. 해남정씨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잊힌 성씨로 통한다고 한다.

이 땅의 아버지들은 딸에 대해 철저히 이중적이다. 딸이 태어나면 아버지는 펄쩍 뛸 정도로 좋아한다. 금이야 옥이야 정성을 다해서 키운다. 하지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보면 딸을 철저히 외면하는 아버지가 많다. 재벌가에서 유독 심하다. 며느리에게는 가업을 물려줘도 딸에게는 냉정하기 짝이 없다.

현정은 현대상선 회장, 최영은 전 한진해운 회장, 양귀애 전 대한전선 명예회장은 남편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준비 없이 경영에 뛰어들었다. 살림만 하던 평범한 주부들이었다. 책임경영의 개념도 부족했고, 전략적 판단도 제때 이뤄지지 못했다. 회사가 부도나거나 위기를 겪는 이유를 ‘며느리 CEO’들만의 잘못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잘못된 후계자 선정의 희생양일 수 있다.

며느리에게는 기업을 물려줘도 딸에게는 인색한 이유는 단 하나다. 딸에게 주는 것은 곧 사위에게 가는 것이고 사위는 성姓이 다른 남이라는 인식 때문일 게다. 이들에게는 친손자만 진짜 손자이고 외손자는 그냥 피붙이일 뿐이다. 무모한 아들 선호 사상이 가문과 기업은 물론 한국경제에 큰 부담을 준 셈이다.

이병철 삼성 그룹 창업자는 그룹의 모체는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에게 넘기되, 딸에게 한솔그룹(이인희)과 신세계그룹(이명희)을 나눠줬다. 정주영 창업자의 현대 가문은 가부장적인 성향이 강해 여성경영인을 좀처럼 찾아보기 쉽지 않다.

만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외아들이 아니라면 아마 지금처럼 영어囹圄의 몸이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국내 최대 그룹의 지배권을 외아들에게 단시일 내에 넘기려다 보니 뒷말이 나왔다. 더구나 이건희 회장이 3년 전 의식불명상태에 빠진 이후에는 그룹의 목표가 원활한 경영승계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재용 부회장에게 형제가 있거나 남매인 이부진ㆍ이서현 사장에게 좀 더 많은 몫을 떼어주었다면 2세 승계가 훨씬 매끄러웠을 것이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딸에게도 경영 참여를 적극적으로 시켜 외아들인 정용진 부회장과 딸인 정유경 사장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한다. 이병철 창업자의 맏손자인 CJ그룹(회장 이재현)도 한때 회장 누나인 이미경씨가 적극 경영에 참여하는 듯 했으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밉보인 이후로 국내에서 사라졌다.

호주제 폐지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던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핵 DNA는 부계와 모계가 똑같은 비율로 제공하지만, 생명체 초기단계에서는 모계의 기여도가 훨씬 높다고 말한다. 세포 속의 에너지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는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만 유전되기 때문에 인류 최초의 조상인 ‘루시’도 찾아낼 수 있다며 남녀차별은 비과학적인 편견의 잔재라고 강조한다.

 딸에게 재산을 물려준 해남정씨는 기억 속에 희미해졌지만, 후손들의 유전자 속에 남아있는 진짜 주인은 그들일지 모른다. 그들은 경제력과 정치력을 배경으로 명석한 인물을 데려와 사위를 삼음으로써 국가의 큰 인재로 키워냈다. 박근혜 탄핵 이후 여성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 여성이 뛰어난 민족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21세기는 남녀가 공존하는 세상이 돼야 한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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