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영역 열정페이 문제

“돈보다 귀중한 걸 얻어갈 테니 견디면서 해.”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열정페이’다. 다행히 열정페이는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여러 대안들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열정페이가 있는 곳이 문화예술계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문제 해결의 핵심 참여자인 공익활동가들도 몇년째 ‘열정페이’를 강요받고 있다. 공익 활동은 과연 ‘돈’과 결부해선 안 되는 걸까.

▲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공익활동가들은 대부분 열악한 처우에 놓여있다.[사진=아이클릭아트]

최근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에서 상연된 연극 ‘창조경제 공공극장 편’이 화제다. 이 연극의 콘셉트는 ‘서바이벌 오디션’이다. 몇몇 청년예술극단이 경쟁자로 참여하면 관객은 이들의 공연을 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공연에 자신의 표를 던진다. 그렇게 최종 선정된 1개 극단은 1800만원을 거머쥔다. 이런 포맷은 유명 TV 프로그램에서 단골 소재로 쓰인다. 하지만 이 연극의 서바이벌 방식은 낯설다. 단순히 우승자를 가려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쇼가 진행되면서 연극은 관객들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경쟁과 보상은 창조활동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관객의 선택을 받은 창조활동은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공공의 지원이 연극인의 창조활동과 경제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등이다.

‘창조경제 공공극장 편’은 2015년 극단 앤드씨어터가 실험극과 상업극, 예술작업과 경제생활 사이에 놓인 예술가의 삶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당시 ‘창조경제’는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기조였는데, 이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예술가의 ‘창조활동과 삶’ 그 자체에 집중했다. 문화예술계의 경제 생태계가 대다수의 구성원을 빈곤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공연 중에 이런 문장이 반복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의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술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경쟁이나 경제성을 따지면 안된다’는 사회적인 관습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말이다. 일부에서 ‘신성한 예술’에 경쟁방식을 도입한 점을 두고 괘씸하다고 비난하는 이유다.

 

하지만 필자의 감상은 달랐다.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젊은 예술가들의 처절한 생존을 떠올리게 했다. 문화예술계는 구성원에게 경제적 희생을 강요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열정페이다.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한스 애빙은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에서 “신성한 예술이라는 관념이 오히려 예술가들에게 경제적인 것을 불순하게 여기게 한다”며 “이들에게 희생을 강조하면서 빈곤으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젊은 연극인의 파격 실험

이런 고민은 문화예술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공익활동가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들은 특정 이슈를 두고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사회적 어젠다를 생산한다. 쉽지 않은 일인 만큼 공익활동가에게는 참 다양한 역량이 요구된다. 뛰어난 기획력을 갖추는 것은 물론 소통에도 능숙해야 한다. 최근에는 온라인을 통한 소통방식이 강조되면서 소셜미디어를 다루는 일도 필수다. 디자인, 홍보 능력도 갖춰야 한다.

그럼에도 인력 부족으로 혼자서 3~4명의 몫을 감당한다. 휴일 보장은 언감생심이다. 퇴근 후에도 손에서 일을 놓을 수 없다. 재정난과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공익단체는 활동가들에게 휴식이라는 보상을 주지 않는다. 대신 과도한 노동과 엄격한 노동윤리를 들이대며 ‘노동자이기를 포기하라’고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낮은 임금이다. 이미 청년 공익활동가는 대학교육을 받으면서 학자금 대출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있다.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은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에도 치인다. 정부가 공언하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공익활동가의 임금은 미래의 가능성을 지운다. 밖으로는 사회 곳곳에 만연한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면서, 속으로는 빈곤과 차별에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는 셈이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공익활동가의 삶과 시간을 착취할 뿐이다. 조직의 장기적인 비전이나 전망을 기대할 수 없다. 동시에 개인의 삶도 포기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열정페이는 이미 활동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졌다. 그러다 보니 많은 활동가들이 1~2년을 못 견디고 그만둔다.

예술가들이 “나의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는 발언이 떠오르는 이유다. 예술가는 자신의 가난을 감수하면서 예술활동을 할 이유가 없다. 공익활동가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가난할 이유는 없다. 공익활동가는 이제 ‘나의 공공활동은 왜 경제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지’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가난 강요 당하는 공익활동가들

공공영역의 생태계는 앞으로도 이들에게 ‘공공활동=과잉노동=가난’을 강요할 공산이 크다. 조직의 이익은 구성원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변화무쌍한 현대사회에서 이는 큰 리스크다. 사회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고 이를 바로잡는 공공영역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어서다. 공익활동가는 이 영역의 핵심 참여자다. 이제 우리도 공익활동가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천주희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위원 chijru@saesayon.org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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