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역사 뒤로 한 서울극장
필름은 멈췄고 추억은 잠겼다
서울극장에 숨은 영화계 현실

“마음이 어떻겠어요. 안타깝고 막막하죠, 서울극장도 오래 버틴 거죠.” 42년 만에 문을 닫은 종로3가 ‘서울극장’. 그 앞에서 25년 넘게 노점을 운영해온 김은영(65ㆍ가명)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된 코로나19 여파를 온몸으로 맞아온 건 김씨나 서울극장이나 마찬가지였다.

42년 역사를 지닌 서울극장이 8월 31일 폐관했다.[사진=뉴시스]
42년 역사를 지닌 서울극장이 8월 31일 폐관했다.[사진=뉴시스]

서울 종로3가는 한때 ‘한국영화의 메카’로 불리던 곳이다. 종로3가를 중심으로 ‘피카디리’ ‘단성사’ ‘서울극장’ 등 3개 영화관이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기업 간판을 단 영화관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단성사는 2010년 초반 문을 닫았고, 피카디리는 ‘CGV 피카디리 1958’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서울극장도 8월 31일 폐관했다.

종로3가를 찾은 건 때늦은 장마가 시작된 8월 23일. 42년 역사의 서울극장이 폐관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지하철 종로3가역을 나와 을지로3가역 방향으로 100여m를 걸으니 서울극장이 눈에 들어왔다. 평일 점심시간을 막 지난 때였지만 영화관 로비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폐관 소식을 접하고 아쉬운 마음에 찾아온 이들이었다.

영화관 안에선 8월 11일부터 3주간 ‘고맙습니다 상영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매일 선착순 100명에게 영화 무료관람을 제공하는데, 이날도 오전 10시부터 티켓이 동이 났다. 남편과 함께 영화관을 찾은 서형숙(74ㆍ가명)씨는 “한달에 한번은 여기서 영화를 봤다”면서 “오래된 영화관이지만 익숙하고 편안해 자주 왔는데 문을 닫는다니 추억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티켓을 손에 든 김재근(70ㆍ가명)씨는 서울극장을 설립한 고故 곽정환 대표를 회상했다. “제작자이자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영화계에 기여를 많이 한 인물로 (곽정환 대표를) 기억하고 좋아했다. 그래서 서울극장도 자주 찾곤 했다.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찾아왔다.”

곽정환 대표는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 출신으로 한국 영화계 ‘대부’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가 운영한 영화제작사 ‘합동영화사’는 1978년 세기극장을 인수했고, 이듬해 ‘서울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개관했다. 1989년에는 상영관을 3개로 늘리면서 서울극장은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됐다.

그래서인지 그 무렵의 서울극장을 추억하는 이들도 많았다. 직장인 이형균(48ㆍ가명)씨는 “예전 여자친구와 넘버3(1997년작)를 보러 서울극장에 왔었다”면서 “극장 앞에서 여자친구와 다투고 혼자 영화를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서울극장은 3개 상영관을 갖춘 최초의 멀티플렉스였는데 대기업 영화관에 밀려 이렇게 저무는구나 싶다”고 말했다.

서울극장을 좋아한 건 비단 중장년층만은 아니었다. 평소 서울극장을 자주 찾았다는 최아현(29ㆍ가명)씨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극장은 오래된 영화관만의 독특한 느낌이 있다. 어르신들이 많아서인지 영화관 ‘에티켓’도 조금 느슨하다. 영화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되셨는지 어르신들이 ‘숙덕’이시기도 하고, 건물 구조도 미로처럼 특이하다. 그런 점들이 불편하기보단 정감이 가서 좋았다.”

과거 서울극장에선 숱한 개봉작이 상영됐다. 사진은 영화 넘버3 스틸컷.[사진=더스쿠프 포토]
과거 서울극장에선 숱한 개봉작이 상영됐다. 사진은 영화 넘버3 스틸컷.[사진=더스쿠프 포토]

월차에 시간을 내고 찾아왔다는 직장인 김수현(34ㆍ가명)씨는 “음향이나 스크린 시설이 좋은 건 아니지만, 보통의 영화를 즐기기엔 충분한 곳이었다”면서 “티켓값도 저렴하고 대형 영화관에선 상영하지 않는 영화들도 상영해 종종 찾았다”고 말했다. 화려한 대기업 영화관 홍수 속에서 서울극장도 영화관 문턱을 낮추는 나름의 역할을 해왔던 셈이다.

실제로 이날 찾아간 서울극장의 풍경은 여느 극장과는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 혼자 영화관에 온 중장년층 관객이 많았다. ‘온라인 예매’가 익숙한 세상이 됐지만, 이곳에선 매표소에 줄을 서는 이들이 많았다. 역시 키오스크나 온라인 예매가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 관객들이 많아서였다.

하지만 서울극장에 드리운 그림자도 눈에 띄었다. 평소보다 사람이 모여들었다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는 상영관 안엔 10여명이 고작이었다. 매표소와 매점이 통합돼 축소 운영되면서 과거 매표소 자리는 텅 빈 지 오래였다. 음료가 가득해야 할 매점의 매대 역시 휑하니 비어있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돌아갔을 팝콘 기계도 멈춰 서 있었다. 네다섯 개의 팝콘 상자만이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 개봉작 포스터 첫 인쇄물은 서울극장으로 갔다.” “영화 개봉 날이면 배급사 직원들이 서울극장 앞에서 관객 반응을 보며 흥행을 점쳤다.” 서울극장을 둘러싼 화려한 소문도 이젠 옛말이 된 셈이다. 실제로 서울극장은 1998년 대기업 계열의 영화관 CJ CGV(1호점 강변점)부터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수익이 악화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폐관 수순을 밟게 된 셈이다.

이를 두고 영화 업계에선 “비단 서울극장만의 문제가 아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코로나19로 영화 업계가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비대면’ 수요가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영화관 대신 넷플릭스 · 왓챠 · 웨이브 등 OTT 서비스로 몰려들었다. 여기에 막대한 콘텐츠를 갖춘 ‘디즈니 플러스’까지 오는 11월 한국 진출을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화관 업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이하 상반기 기준ㆍ영화진흥위원회) 1억932만명에 달하던 영화 관객 수는 올해 2002만명으로 81.6% 감소했다. 당연히 영화관 매출액도 고꾸라졌다. 영화관 총매출액은 같은 기간 85.3%(9307억원→1863억원)나 줄었다.

1979년 개관한 서울극장은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다.[사진=연합뉴스]
1979년 개관한 서울극장은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다.[사진=연합뉴스]

영화관 업계 관계자는 “통상 월 관객 수가 총 1300만명 이상은 돼야 영화관이 수익을 낸다고 본다”면서 “하지만 지난해 1월 이후 관객 수가 1000만명을 넘어선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규모를 떠나 모든 영화관이 2년 가까이 적자를 버티고 있는 셈이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업계 1위인 CJ CGV조차 적자 영업을 지속하고 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69.9%(1조9423억원→5834억원), 418%(1220억원→-3887억원) 감소했을 정도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할수록 어려움에 처하는 건 서울극장과 같은 소규모 영화관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난해엔 경영난 등으로 임시 휴관(이하 2020년 12월 31일 기준)하거나 폐업하는 영화관이 속출했다. 서울에선 낭만극장, 명보아트시네마, 시네마상상마당, 아트하우스모모 등이 휴관을 택했다. 전국적으로는 55개 영화관이 휴관했고, 17개 영화관이 폐관했다.

서울극장보다 오래된 극장으로 꼽히는 충무로 ‘대한극장(1958년 개관)’도 상황이 녹록지 않다. 대한극장을 운영하는 세기상사는 10년 넘게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최대주주가 중견 수산업체 우양산업개발로 바뀌기도 했다.[※참고: 세기상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22억원, 영업적자는 12억원을 기록했다.]

한국상영관협회 관계자는 “소규모 영화관들의 경우 경쟁에서 밀려 관객이 줄고, 광고 수익을 내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설이 낙후돼도 리뉴얼할 여력이 안 되다 보니 경영이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래서인지 폐관을 고려하는 영화관이 숱하다. 영화관이 문을 닫으면 영화제작사, 투자사, 배급사까지 어려움에 처한다. 영화업계가 큰 위기에 직면했다.”

사실 서울극장처럼 오래된 극장의 폐관은 ‘역사적 공간’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손실임에 분명하다. 서울시가 2013년 서울극장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폐관한 서울극장은 어떻게 활용될까. 서울극장 측은 “향후 계획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공간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시민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정석 서울시립대(도시공학)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서울극장이란 역사적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 (운영업체 측이) 시민주주를 모집하거나 민간 기업이 나서서 대안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뜻있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먼저 일어나는 것도 문화 보존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이다.” 문을 닫은 서울극장에선 과연 어떤 역사가 시작될까.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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