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랩 판매 중단 논란

지난 9월 미래에셋증권 퇴직연금 랩어카운트 상품의 판매가 중단됐다. 12년간 멀쩡하게 판매되던 퇴직연금 상품이 사라진 셈이다. 이유는 고용노동부가 입장을 바꾼 탓인데, 그 배경을 두고 뒷말이 나온다. 퇴직연금 시장을 노리는 시중은행, 보험사 등이 입김을 넣은 게 아니냐는 거다. 진실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금융업계의 밥그릇 싸움에 노동자의 노후만 흔들리게 됐다.

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금융업계의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다. 문제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지 의문이라는 점이다.[사진=뉴시스] 
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금융업계의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다. 문제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지 의문이라는 점이다.[사진=뉴시스] 

회사원 최승현(가명·49)씨는 지난 10월 6일 퇴직연금 상품에 가입한 증권사로부터 한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퇴직연금랩(랩어카운트) 신규판매를 중단합니다. 기존 가입자는 정해진 기한(2022년 6월 30일)까지 퇴직연금랩을 해지하거나 다른 상품으로 변경해야 합니다.”

지난 5년간 퇴직연금 상품을 운용했던 최씨는 갑작스러운 상품 폐지 소식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최씨는 “수익률이 나쁘지 않았던 상품이라 아쉬움이 크다”며 “퇴직연금 상품을 다시 선택하는 것도 고민”이라고 말했다.

미래에셋증권이 운용하던 퇴직연금 ‘랩어카운트’ 상품이 시장에서 사라지게 됐다. 이는 미래에셋증권이 2009년 도입한 상품으로 올해 8월 기준 가입자는 2만1500명, 운용금액은 1조3000억원이다.

미래에셋증권이 10년 넘게 잘 판매하던 상품을 갑자기 접은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별다른 게 아니다. 퇴직연금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지난 9월 랩어카운트를 통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게 법령 위반이란 해석을 내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우선 랩어카운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랩어카운트는 금융사가 고객이 맡긴 돈을 알아서 굴려주는 금융상품이다. 고객의 투자성향에 따라 운용방식과 투자처를 추천하고 그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종합금융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랩어카운트 상품이 투자에 자신이 없거나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다.

인기 요인은 또 있는데, 그건 수수료와 수익률이다. 미래에셋증권 퇴직연금랩의 수수료는 올해 기준 0.01%(가입 첫해 무료, 2~4년차 0.05%, 5년 이후 0.01%)로 비교적 저렴하다.

수익률도 나쁘지 않다. 주력 상품(주식비중 40%)의 수익률은 6개월 2.5%, 1년 8.8%, 3년 22.7%로 집계됐다(2021년 8월 기준). 출시 이후 연환산 수익률은 5.8%였다. 고용노동부가 밝힌 지난해 퇴직연금의 연환산(지난 10년 기준) 수익률이 2.5%였다는 걸 감안하면 2배 이상 높은 수익을 올린 셈이다.


사실 미래에셋증권이 퇴직연금 랩어카운트를 판매할 수 있었던 건 고용노동부의 유권해석 덕분이었다. 2008년 미래에셋증권은 노동부에 랩어카운트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당시 노동부는 “랩어카운트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하 근퇴법)에 별도로 규정돼 있지 않다”며 “간접투자자산운용법(지금의 자본시장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랩어카운트 계약을 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사실상 랩어카운트 판매를 허용한 셈이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이 해석을 십수년 만에 뒤집었는데, 그 근거는 근퇴법 시행령이다. 2014년 근퇴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퇴직연금이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을 보험계약과 특정금전신탁(신탁계약)으로 규정했다. 특정금전신탁은 가입자가 상품의 운용방법 등을 지정하는 상품이다.

십수년 만에 입장 바꾼 고용노동부


퇴직연금 사업자는 고객이 맡긴 자산의 운용 방식을 구체적으로 지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만 자금을 운용해야 한다는 규제가 생긴 셈이다. 이에 따라 퇴직연금 사업자가 모든 것을 관리하는 랩어카운트는 ‘불특정금전신탁’에 해당해 판매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법이 허용한 범위를 넘어선 것을 바로잡는 건 필요한 일이다. 퇴직연금 랩어카운트를 미래에셋증권만 판매하면서 특혜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참고: 퇴직연금 랩어카운트는 미래에셋증권에서만 판매했다. 시행령이 개정됐지만 소급입법금지 원칙이 적용된 탓이다. 하지만 다른 증권사는 시행령으로 퇴직연금 랩어카운트를 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필자는 고용노동부의 뒤늦은 입장 번복이 퇴직연금 시장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장에선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디폴트옵션 도입을 위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일부 개정 법률안’은 지난 1월 발의된 상태다.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DC·Defined Contribution)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자산 운용 방식을 결정하지 않았을 때 금융회사가 자동으로 상품에 투자하는 제도다. 가입자가 어떤 금융상품에 가입할지 선택하지 않아도 금융회사가 알아서 퇴직연금을 운용한다는 점에서 랩어카운트와 비슷하다. 디폴트옵션 도입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고용노동부가 랩어카운트 판매를 금지한 것을 두고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일종의 음모론도 제기된다. 2014년 근퇴법 시행령 개정 후에도 아무 움직임이 없던 고용노동부가 왜 이제 와서 입장을 뒤집었냐는 것이다. 이를 두고 퇴직연금 시장에서 증권사에 밀리고 있는 은행과 보험업계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최근 증권사는 개인형퇴직연금(IRP·Individual Retirement Pension) 수수료를 낮추는 등 퇴직연금 수요자를 확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을 주무르던 은행과 보험업계로선 눈뜨고 손님을 빼앗기는 형국이 된 셈이다. 여기에 디폴트옵션 도입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은행과 보험업계가 퇴직연금 랩어카운트에 ‘딴지’를 걸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고 있다.

잠자고 있는 디폴트옵션법

물론 퇴직연금 랩어카운트를 둘러싼 소문이 진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금융업계가 퇴직연금을 앞에 두고 밥그릇 싸움을 벌이는 동안 노동자의 노후가 뒷전으로 밀렸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장 미래에셋증권의 퇴직연금랩 상품에 가입한 2만여명의 노동자는 안정적인 수익률을 포기하고 새로운 퇴직연금 상품을 찾아 나서야 한다. 다른 퇴직연금 가입자도 마찬가지다. 퇴직연금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저조한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지난 1월 발의된 디폴트옵션 관련법은 1년 가까이 국회에서 잠만 자고 있다. 이 역시 디폴트옵션을 둘러싼 투자업계와 은행·보험업계의 치열한 논쟁 탓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작 노동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금융업계의 밥그릇 싸움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인 이유다.

글 = 조경만 금융컨설턴트(엉클조 대표)
iunclejo@naver.com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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