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EU와 달리 힘 못 쓰는 이유
2018년 합의 서두른 게 패착이었나

미국의 무역확장법 232조 시행을 앞둔 2018년 3월,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과의 막판 협상을 통해 ‘쿼터(수출 할당량)’ 합의를 이끌어냈다. 강경 대응 대신 원만한 합의를 선택한 결과였다. 일부에선 “쿼터가 관세보다 나을 거란 보장이 없다”는 우려를 쏟아냈지만 정부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자신했다. 그로부터 3년여, 미국과의 규제 완화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정부의 첫 대응이 문제였다”는 지적이 다시 흘러나오고 있다. 이유가 뭘까.
 

정부가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쿼터를 선택한 게 되레 국내 철강업계의 발목을 잡았다는 지적이 나온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정부가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쿼터를 선택한 게 되레 국내 철강업계의 발목을 잡았다는 지적이 나온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국과 일본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다. 유럽연합(EU)과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협상하겠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지난 11월 9일(현지시간) ‘철강 관세’와 관련해 영국과 일본에 전한 메시지다. 앞서 EU와 철강 관세 분쟁의 합의점을 찾은 미국이 영국ㆍ일본과도 협상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참고: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철강ㆍ알루미늄을 수입하는 모든 국가에 규제 조치(관세 또는 쿼터)를 내렸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미국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특정 제품의 수입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이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철강 관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과 일본을 찾았다. 지난 10일(현지시간)엔 EU에 제안한 것처럼 관세를 철폐하는 대신 쿼터(수출 할당량)를 부과하는 조정안을 일본에 전달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3년여간 지속된 철강 분쟁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국내 철강업계에도 기대감이 흘렀다. 미국의 철강 수입 규제는 우리나라에도 중요한 통상 현안 중 하나다. 철강 규제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철강을 수출하는 국가 중 세번째(2017년 기준)로 수출량이 많았다. 

하지만 2018년 규제 철퇴를 맞은 이후엔 대미對美 철강 수출량이 거의 반토막 나면서 2020년 4위로 내려앉았다. 지난 11월 1일 미국-EU 간 합의 소식이 들려온 직후, 정부가 민관 합동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모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별다른 진척이 없다. EUㆍ일본ㆍ영국 등과 적극 협상에 나서고 있는 미국이 우리 정부의 계속된 협상 요청에는 묵묵부답이라서다. 이유가 뭘까. 통상 전문가들은 “EU, 일본 등 국가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힘이 약한 것도 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면서 “우리나라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도 있다”고 지적했다. 무슨 말일까. 

 

■의문❶ 쿼터 최선이었나 = 미국의 무역확장법 232조 시행을 앞두고 업계 안팎으로 시끌시끌하던 2018년 3월 26일, 미국 출장길에서 돌아온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철강 관세 협상에서 얻은 성과를 자축하며 이렇게 전했다. “한국이 가장 먼저 협상을 마무리하면서 철강 기업의 대미 수출 불확실성을 조기에 해소했다.” 

산자부가 자신만만하게 꺼내놓은 성과는 쿼터제였다. 미국이 한국산 철강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대신 2015~2017년 3년 평균 대미 철강 수출량의 70%까지만 수출을 허용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당시 전문가들 사이에선 관세와 쿼터 중 어느 것이 유리할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지만 산자부는 “쿼터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자신했다.[※참고: 쿼터를 선택한 국가는 우리나라와 아르헨티나, 브라질 3곳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적용된 쿼터는 각각 135%, 70~100%다.] 
 
그로부터 3년여, 우리나라의 대미 철강 수출량은 2017년 354만톤(t)에서 지난해 194만t으로 45%가량 줄었다. 관세를 면제 받았다곤 하지만 쿼터가 적용된 만큼 수출량이 감소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정말 쿼터가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줬는지는 알 수 없다. 

코트라(KOTRA)가 2018년 1~11월 미국의 철강 수입 통계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쿼터가 유리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들다. 관세를 맞은 캐나다와 멕시코는 전년 동기 대비 수출량과 수출액이 모두 늘었기 때문이다. EU도 수출량은 조금 줄었지만 수출액은 되레 증가했다. 중국과 일본은 수출량과 수출액이 모두 줄긴 했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감소폭이 양호했다. 

쿼터를 선택한 우리나라와 관세를 맞은 국가들 간에 결과가 달랐던 건 변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는 관세를 피하기 위해 ‘품목 예외’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미국은 ‘품목 예외’ 신청을 받아 자국 내에서 해당 품목의 공급량과 품질이 떨어진다고 인정되면 관세를 면제했다. 쿼터를 선택한 국가들은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없었다가 뒤늦게야 허용됐다.

 

미국과의 협상 내용을 브리핑하고 있는 김현종 본부장.[사진=뉴시스]
미국과의 협상 내용을 브리핑하고 있는 김현종 본부장.[사진=뉴시스]

미국 내수 철강 가격도 변수로 작용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시장가격이 25% 관세를 커버할 만큼 오르면 쿼터가 적용된 국가엔 불리하고, 반대로 25% 관세를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낮으면 쿼터를 적용한 게 옳은 선택이 될 수 있다”면서 “하지만 무역확장법 232조 시행 이후 미국 내수 철강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는 일부 기간만 살펴본 결과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전체 통계를 놓고 보면 관세와 쿼터 중 어느 것이 나았다고 장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산자부의 자화자찬처럼 우리가 쿼터를 선택한 게 정말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의문❷ 합의 왜 서둘렀나 = 2018년 무역확장법 232조를 꺼내든 미국에 세계 각국은 강경하게 맞섰다. EU, 중국, 캐나다, 멕시코, 인도, 러시아, 스위스, 노르웨이, 터키 등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고, 여기에 더해 중국과 EU, 캐나다, 멕시코, 터키, 러시아는 보복관세로 맞대응했다. 

우리나라도 처음엔 강경 대응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주요국과의 공조에 따른 WTO 제소를 적극 검토하고, 주요 20개국(G20) 등 다자협의체를 통해 자유무역을 저해하는 행위를 자제하도록 국제사회에 촉구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대응 전략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강경하게 대응하는 대신 쿼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인교 인하대(국제통상학) 교수는 이렇게 꼬집었다. “국제통상규범 상 인정하지도 않는 쿼터를 수용했기 때문에 WTO에 제소하는 길이 막혔다. 더구나 미국과 합의를 했기 때문에 뒤늦게 대응할 수도 없었다. 성과에 급급해 미국이 원하는 대로 다 받아준 것이라고 본다.”

 

일부에서 “이미 내어줄 만큼 내어줬으니 미국과의 협상에서 요긴하게 쓸 카드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우리나라의 철강 규제 협상 속도가 더딘 것도 그 때문이라는 거다. 철강업계 관계자도 “EU가 미국과 빠르게 합의할 수 있었던 것도 EU가 WTO 제소ㆍ보복관세 등으로 강하게 맞불을 놨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두번째 선택의 기로 = 우리 정부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철강 규제 완화를 빌미로 중국의 철강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EU와의 협상에서도 미국은 중국의 과잉 생산 문제를 겨냥하며 탈탄소화를 촉진하자고 뜻을 모았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미국과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을 때 ‘반중反中동맹’을 요구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나라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문제는 지금으로선 어떤 선택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거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 실장은 “반중동맹이 어떤 형태로 갈지에 따라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도 다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보긴 어렵다”면서 “반중동맹에 들어가서 중국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거나, 들어가지 않아서 외톨이가 되거나 두 시나리오 모두 크게 다를 게 없어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할 문제다”고 말했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정부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이번엔 단추를 잘 채울 수 있을까.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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