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EU산 철강 수입 규제 완화
한국 위한 협상 테이블은 없어
미국에 제안할 협상 카드 있나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시행했던 철강 수입품 규제 조치를 잇따라 완화하고 있다. 지난 10월엔 EU산 철강 수입품에 부과했던 규제를 완화했고, 최근엔 일본에도 협상안을 전했다. 영국과도 규제 완화를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안에 끼지 못했다. 우리 정부의 지속적인 의사 표명에도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왜일까.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철강 규제 완화 조치가 담긴 공동 합의안을 발표했다.[사진=연합뉴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철강 규제 완화 조치가 담긴 공동 합의안을 발표했다.[사진=연합뉴스]

2018년 5월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꺼내든 ‘무역확장법 232조’는 3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미국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특정 제품의 수입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이다. 당시 미국 정부가 휘두른 무역확장법 232조의 칼날은 세계 각국의 철강 산업을 향했다. 철강ㆍ알루미늄 수입품에 각각 25%, 10%의 관세를 부과했고, 이는 미국에 철강제품을 수출하는 국가들의 숨통을 조였다. 

우리나라도 그중 한곳이었다. 우리나라는 관세 대신 ‘쿼터(할당량)’를 받았다. 정부가 미국과 협상해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2015~2017년 3년 평균 대미對美 철강 수출량의 70%까지만 수출할 수 있다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수출 피해를 막진 못했다. 규제를 받기 직전인 2017년 354만톤(t)이었던 대미 철강 수출량은 2018년 254만t으로 감소했고, 지난해엔 194만t까지 줄어들었다. 전체 철강 수출량에서 대미 수출량이 차지하는 비중도 기존 12%대에서 규제 이후 6%대로 반토막 났다. 

특히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품목은 피해가 더욱 컸다. 대미 수출 비중이 90%를 훌쩍 넘는 ‘유정용강관(OCTG)’을 포함한 강관류가 대표적이다. 대미 강관 수출량은 2017년 202만t에서 2018년 이후 90만t→76만t→61만t으로 해마다 쪼그라들었다. 

기업 실적도 급감했다. 대표 강관업체인 넥스틸의 매출은 2017년 4750억원에서 이듬해 2410억원으로 절반이 줄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200억원에서 67억원으로 60% 넘게 감소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강관 시장은 유가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 2015~2016년은 저유가 때문에 업황이 안 좋아 수출량이 적었다”면서 “그러다보니 실질적인 쿼터는 평년의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참고: 2020년은 코로나19와 저유가가 수출에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2018~2019년은 그렇지 않다. 더구나 2020년에도 대미 수출 비중이 유독 많이 줄었다.]

 

그런데 최근 변화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미국이 트럼프 시대부터 유지해온 보호무역 기조를 한수 접고 화해의 제스처를 내밀면서다. 우선 유럽연합(EU)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다.

지난 10월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공동 발표한 합의안을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은 EU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부과하던 관세를 철회하고 대신 75%의 쿼터를 적용한다. EU는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의 대응 조치였던 보복관세를 철폐한다. 무역확장법 232조 관련 진행 중인 세계무역기구(WTO) 분쟁도 종료한다.”

얼핏 보면 우리나라와 같은 ‘쿼터’지만 세부 내용은 다르다. 무엇보다 할당량이 5%포인트(한국 70%ㆍEU 75%) 더 많다. 저율관세할당(TRQ)도 적용된다. TRQ는 할당량을 초과하는 물량에 관세를 매기는 걸 말한다. 쉽게 말해, 75%의 쿼터를 넘겨도 관세(10~25%)를 내면 추가 수출이 가능하다는 거다.

아울러 할당된 양을 모두 소진하지 못했을 땐 협의를 통해 다음 분기로 이월할 수 있다는 여지도 남겨뒀다.[※참고: EU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지난 10일(현지시간) 일본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긴 분쟁 해결 방안을 제안했다.]

이런 조건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매우 크다. 국내 철강업체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TRQ가 없으면 쿼터를 소진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례로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규제가 2018년 5월부터 시작했는데, 1월부터 소급 적용됐다. 하지만 이땐 쿼터를 모두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하반기엔 아무것도 못했다. 쿼터 이월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엔 미국 항만의 물류적체 현상이 심해서 배가 항구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다 위에서 대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상태로 해가 넘어가버리면 쿼터가 사라져버린다. 쿼터 이월은 생각보다 큰 혜택이다.”

[※참고: 연간 수출 할당량이 100이라고 가정했을 때, 분기별 최대 수출량은 30으로 제한된다. 업황이 좋다고 몰아서 수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018년 무역확장법 232조 시행 이후 대미 철강 수출량이 급감했다.[사진=뉴시스]
2018년 무역확장법 232조 시행 이후 대미 철강 수출량이 급감했다.[사진=뉴시스]

그 때문에 국내 철강업계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규제 완화로 EU와 일본의 대미 수출량이 늘면 우리나라 수출 플랜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아서다. 물론 우리나라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수출 규제 완화를 요구하면 된다. 실제로 미국-EU 협상 이후 다급해진 우리나라 정부는 민관 합동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1월 9일 미국을 방문했을 때 무역확장법 232조 문제를 해소할 실마리를 얻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 것도 그 때문이다. 11월 18일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한국을 찾았을 때도 철강 수출 규제 관련 협의가 진척을 이룰 거란 전망이 쏟아졌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산자부는 지난 13~15일 또 한번 미국 출장길에 올랐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어찌 보면 미국과의 합의안을 이끌어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이원석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 차장도 “미국의 수출 규제 완화 소식이 들려오고 있고, 우리도 지속적으로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가 미국에 투자ㆍ기여하는 게 적지 않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철강 수출 규제 완화 요구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다. 무엇보다 협상 테이블에서 꺼내들 만한 ‘패牌’가 적다.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 미국은 ‘반중反中 동맹’ 체제를 강화하길 원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EU와 일본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연대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EU는 10월 협상 당시 중국의 과잉 생산 문제를 겨냥해 탈탄소화를 앞당기겠다는 공동 목표를 세웠는데, 그 자리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합의가 ‘중국과 같은 더러운 철강’의 미국 시장 진입을 제한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바 있다. 일본도 지난 11월 15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일 통상 협의체’를 세우겠다며 미국과의 공조에 협력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반중 동맹에 참여하라는 미국의 압박에 동조하기가 어렵다. 대중對中 철강 수출량이 대미 수출량보다 2배가량 많아서다. 수입량에서도 10배 차이가 난다. 국내 철강업계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만큼 반중 동맹에 참여했을 때 후폭풍이 적지 않을 거란 얘기다. 

정인교 인하대(국제통상학) 교수는 “단순히 철강 하나만 놓고 보긴 어렵다”면서 “미국과 EU 간에는 철강 문제 외에도 상호 협력해야 할 사안들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우리나라엔 그럴 만한 카드가 없는 데다 최근 한미 관계가 돈독하다고 보기도 어려워 협상이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움츠러들었던 철강 업황이 내년엔 회복될 거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유가는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고, 미국은 지난 11월 인프라 법안을 통과시켰다. 국내 철강업체들로선 미국이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출 규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에 불과할지 모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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