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전쟁과 섣부른 위기론
파운드리 기술력 앞서 있는 삼성
경쟁사 페이스에 휘말릴 필요 없어

삼성전자를 둘러싼 위기론이 불거지고 있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 패권경쟁에 열을 올리고, TSMCㆍ인텔 등 경쟁기업들이 투자 확대를 꾀하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이렇다 할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어서다. 일부에선 리더의 부재를 지적하며 ‘이재용 사면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성전자가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지 않는 게 정말 문제일까. 도리어 합리적 경영 판단이진 않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기승전-이재용 사면론’과 삼성전자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분석해 봤다.
 

인텔과 TSMC는 최근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아직 별다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인텔과 TSMC는 최근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아직 별다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것이 인프라다. 과거의 인프라를 수리할 게 아니라 오늘날의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지난 4월 12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대책회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손에 웨이퍼(반도체를 만드는 주재료ㆍwafer)를 들어 보이며 이같이 선언했다. 

반도체 품귀현상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본격 나서겠다는 뜻이었다.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기 위해 500억 달러(약 56조원)를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날 회의에 삼성전자ㆍ인텔ㆍTSMC 등 19개 반도체 수요ㆍ공급기업을 초청한 것도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건 미국만이 아니다. 같은날 유럽연합(EU)은 36억 유로(약 5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밝힌 데 이어 30일엔 인텔, TSMC와 회담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대만 정부도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한 지원정책을 내걸고 있다. 반도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건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ㆍfoundry) 업체다. 반도체 품귀현상을 해결할 열쇠를 이들 업체들이 쥐고 있어서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 기업 중에서도 특히 파운드리 기업들의 투자를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참고: 파운드리는 반도체 설계도를 받아 위탁생산해주는 반도체 제조전문기업을 말한다.] 

세계 각국의 요청에 파운드리 업체들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세계 1위 종합 반도체 기업 인텔(미국)은 지난 3월 200억 달러(약 23조원) 규모의 투자계획과 함께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했다. 2018년 파운드리 사업을 접은 지 3년여 만이다. 백악관에서의 반도체 대책회의가 끝난 직후엔 “차량용 반도체를 수개월 내에 생산하겠다”며 미국 정부의 투자 요구에 화답하기도 했다. 차량용 반도체는 공급부족 문제가 가장 극심한 제품이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 TSMC(대만)도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TSMC는 향후 3년간 1000억 달러(약 111조원)를 투자하겠다는 플랜을 발표했다. 미국에 첨단 반도체 공장 6개를 짓는 360억 달러(약 40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에 이은 추가 조치다. 세계 3위 파운드리 기업 글로벌파운드리(미국) 역시 생산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14억 달러(약 1조5000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공개했다. 

 

반면 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기업이자 세계 2위 파운드리 기업인 삼성전자는 아직 묵묵부답이다. 삼성전자 측에 따르면 미국에 170억 달러(약 19조원)를 투자하겠다는 큰 계획은 있다.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쓸지’ ‘투자 규모를 더 확대할지’ 등의 세부적인 사항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그 때문인지 숱한 미디어에선 삼성전자의 빠른 투자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 투자가 빈약하거나 타이밍이 늦으면 반도체 패권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부에선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부재한 탓에 투자가 지연되고 있다”며 ‘사면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은 ‘이재용 사면론’까지 곳곳에서 외쳐댈 정도로 심각한 걸까. 이 뻔한 질문은 함의含意가 크다. 경쟁력 제고를 위해 필요한 투자라면 독려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신중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 지금부터 삼성전자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따져보자.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기술력이다. 파운드리 업체의 경쟁력은 누가 더 반도체를 작게 만드느냐에 따라 판가름난다. 반도체가 작을수록 성능은 높이고 소비전력은 낮출 수 있어서다.

하지만 반도체를 작게 만드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현재 파운드리 기업 중에서 5나노미터(1㎚ㆍ10억분의 1m) 이하의 미세공정 기술을 가지고 있는 곳은 TSMC와 삼성전자 둘뿐이다. 

 

삼성전자의 투자 결정을 위해 이재용 부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사진=연합뉴스]
삼성전자의 투자 결정을 위해 이재용 부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사진=연합뉴스]

당연히 돈을 쏟아붓는다고 당장 ‘작은 반도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례로 파운드리 업계의 3위 글로벌파운드리와 4위 UMC(대만)는 7나노미터 공정 개발을 포기했다. 반도체 명가 인텔도 10나노미터 이하 공정 기술을 개발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파운드리의 기술력은 단기간에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참고: 물론 모든 반도체 제품을 만드는 데 첨단 미세공정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일례로 차량용 반도체는 20나노미터대 공정기술로 만든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해당 제품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차량용 반도체 분야의 투자 확대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투자는 ‘신중하게’ 진행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종환 상명대(시스템반도체공학) 교수는 “공정개발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기술의 갭을 단시일 내에 좁히는 건 쉽지 않다”면서 “2~3년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 좋을지 신중하게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 삼성전자가 투자를 확대해야 할 두번째 이유를 보자. 그건 생산능력이다. 쉽게 말해, 더 많은 공장을 지어 공급량을 키워야 할 때 공격적인 베팅을 해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이 역시 ‘급할 게’ 없다. 설비투자가 대략 2~3년에 걸쳐 진행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후 반도체 시장의 수급 현황을 살펴봐야 한다. 만약 2~3년 후 반도체가 ‘공급과잉’으로 전망된다면 투자속도를 늦추는 게 현명한 판단일 수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올해 반도체 수요가 몰릴 거라는 건 지난해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차량용 반도체 문제가 터지면서 더 부각됐을 뿐이다. 반도체 산업 전반을 놓고 보면 공급과잉이다. 개별기업 입장에서 보면 중복투자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133조원의 대규모투자 계획을 실행 중이다.” 

 

이런 맥락을 감안할 때 삼성전자의 신중한 발걸음은 현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일부에선 ‘이재용 사면론’까지 주창하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정작 호떡집엔 불이 나지 않았다는 거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한파로 가동이 중단됐던 미국 오스틴공장을 오는 6월부터 정상 가동할 예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평택캠퍼스 P3 라인도 공사가 한창이다. 올 하반기엔 구체적인 투자계획이 나올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투자를 확대했다간 되레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가 굳이 ‘미국과 유럽의 요구에 맞춰’ ‘경쟁업체 행보에 따라’ 투자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김양팽 연구위원은 “다른 기업, 다른 나라 장단에 맞춰 투자를 결정하는 건 한심한 얘기”라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경쟁기업들이 투자하니까 우리도 해야 한다는 건 맞지 않는 얘기다. 아울러 미국이 투자를 유치해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겠다는 건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얘기다. 우리가 그 장단에 맞출 필요가 없다. 언제 어디에 투자하든 경쟁력이 있으면 수요가 몰리는 게 반도체다. 연연할 필요가 없다. 삼성전자는 스스로의 페이스에 맞추면 된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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