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태원의 사람 |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
사회봉사로 인생 2막 열어
두 아들과 함께 두산서 ‘독립’

박용만(67) 전 두산그룹 회장의 ‘포스트 두산’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두산가家 3세인 그는 지난해 11월 39년간 몸담았던 두산그룹을 두 아들과 함께 떠나 독립했다. 컨설팅 회사와 봉사단체를 운영하는가 하면 사진 전시회도 열었다. 영혼이 자유롭고 사람 좋아하는 기업인 박용만의 인생 2막을 들여다본다.

박용만 전 회장은 최근 그늘에 있는 사람을 돌보고 있다. 지난 3월 ‘오! 라이카’ 사진전에서 아내와 셀카를 찍고 있는 박 전 회장.[사진=뉴시스]
박용만 전 회장은 최근 그늘에 있는 사람을 돌보고 있다. 지난 3월 ‘오! 라이카’ 사진전에서 아내와 셀카를 찍고 있는 박 전 회장.[사진=뉴시스]

“사회사업가? 자유인? 난 뭔가로 규정되는 게 싫어요.” 박용만 전 회장은 최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67살에야 처음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나에게 (나를 움직이는) 중요한 원천은 사람을 향한 호기심”이란 말도 했다. 

지난해 2월 생애 처음으로 낸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서두에서는 자신을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소개했다. 올 2월 가진 북 토크에서 “그냥 있는 대로 솔직하게 사는 게 제 정체성”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자유’ ‘솔직’ ‘사람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 이런 말들이 기업인 박용만을 이해하는 키워드란 얘기다.

그렇다면 지난해 11월 가업家業인 두산을 떠나 독립한 다음 그가 무슨 일을 해왔길래 “67살에야 처음 자유를 누린다”고 했을까. 


그는 올 초부터 벨스트리트파트너스라는 컨설팅 회사를 새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 3월 하순엔 젊은 시절 못 이뤘던 사진작가의 꿈을 달래느라 서울 종로 국제갤러리에서 전시회 ‘오! 라이카(O! Leica) 2022’도 열었다. 당시 아내 강신애 여사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냥 보기에는 회사 운영과 사진 취미보다 사회봉사에서 인생 2막의 자유와 보람을 더 느끼는 것 같다. 세상이 다 아는 기업인인데 자신을 두고 “사회사업가? 자유인?” 하며 자문하는 데서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인터넷에서 ‘박용만’을 찾아보면 직업이 대부분 ‘기업인’으로 나온다. 42년(두산 39년·외환은행 3년)에 걸친 인생 1막 중 1998년 ㈜두산 대표이사 사장 이후 24년 정도는 소위 CEO(최고경영자)로 살았다. 2013년부터 8년간 맡았던 대한상의 회장직은 기업인 박용만의 이름을 더욱 알렸다.

사람들이 박용만을 기업인으로 알 수밖에 없도록 살았다. 하지만 두산을 떠나 독립하면서 그는 생각을 확 바꿨다. 지난해 11월 10일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두산경영연구원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그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이제 두산을 떠나는 것이니 나도 독립이다.” “이제부터는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더 돌보고 사회에 좋은 일 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혼자만 떠난 게 아니다. 두산에서 일하던 장남 박서원(43) 오리콤 부사장과 차남 박재원(37) 두산중공업 상무도 자기들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함께 떠났다. 아버지 박용만은 역시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장남은 패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로, 차남은 실리콘 밸리 벤처캐피털 일을 하게 됐다.”

자기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편한 둥지 ‘두산’을 떠난 두 아들(오너 4세)을 연민하는 감정도 드러냈다. 박용만은 “삼부자 모두가 각각 독립하는 셈”이라고 가감 없이 적었다. 뭔가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요즘 그는 매주 월·목요일 이른 아침에 서울 동대문구 쪽방촌 주방으로 출근하고 있다. 대한상의 회장직 퇴임을 앞둔 2020년 11월 그가 건물을 사서 꾸민 일터다. 여기서 직접 반찬을 만들어 어르신들에게 배달한다. 금요일엔 서울 종로 노인급식소에서 대체식품 포장 봉사도 한다. 

박용만이 사회봉사에 큰 관심을 갖게 된 알려진 계기는 이렇다. 2004년 친구가 다니는 보육원에 따라갔다가 ‘남을 돕는 기쁨’을 알게 됐다고 한다. 2015년 천주교 단중독사목위원회를 통해 서울역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도시락 봉사를 나가면서 관심이 더욱 커졌다. 

그는 ‘실바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다. 국제 구호단체 ‘몰타기사단’ 한국지부를 이끌며 매주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아마추어 요리사로 봉사한다고 그의 산문집은 적고 있다. 

기업인 시절 그는 호기심 넘치는 ‘얼리 어답터’이자 소통에 아주 능한 대기업 오너  CEO(최고경영자)로 유명해졌다. 대한상의 회장 때도 숱한 일화를 남겼다. 우리 사회와 경제계, 정계 등에 소위 ‘입바른 소리’를 많이 했다. 

데이터와 팩트에 근거해 의견을 개진했던 스타일 때문에 미움보다는 우리 사회에 신뢰감과 울림을 많이 남겼다. 선견력과 구조적 판단, 대안 제시능력이 앞선다는 얘길 들었다. 대한상의를 국내 대표적 경제단체로 그 위상을 높였다는 평도 많았다.  

두산에서 물러나 독립한 이후에도 그는 툭하면 정치로부터 소환됐다. 지난 3월 윤석열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로 거론됐다. 4월엔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도 말이 오갔다. 하지만 그런 얘기들은 곧장 가라앉았다. “정치는 자유로운 영혼이 할 일이 아니다. 고민해보고 2014년쯤 (안 하기로) 완전히 결론을 냈다”는 입장을 견지해 온 때문이다.  

그는 두산그룹 초대 회장인 고故 박두병 회장의 6남 1녀 중 5남이다. 자유롭고 똑똑한 그가 4명의 형들 밑에서 섞여 지내기가 왠지 쉽지 않았을 것만 같다. 두산그룹은 국내 최고最古의 역사(126년)를 자랑하는 굴지의 기업 그룹이다. 올해 기준 국내 재계 순위 16위다. 

박용만 전 회장은 CEO 시절 ‘미스터 쓴소리’로 유명했다. 사진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시절 박 전 회장.[사진=뉴시스]
박용만 전 회장은 CEO 시절 ‘미스터 쓴소리’로 유명했다. 사진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시절 박 전 회장.[사진=뉴시스]

박용만은 두산가 풍습대로 형들에 이어 2012년 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아 약 5년간 재임했다. 2016년 4세 장조카 박정원(60)에게 회장직을 물려줬다. 오너 3세 마지막 회장이었다. 

그의 자유를 향한 이력은 군데군데 남아 있다. 첫 직장은 뜻밖에도 한국외환은행이었다. 두산음료 영업 상무 시절(35세)엔 사진가가 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는 봉사를 위해 7년 전인 2015년 11월 초 사재 100억원과 두산그룹 출연금 100억원을 들여 재단법인(현 ‘같이 걷는 길’)을 미리 설립했다. 인생 2막을 봉사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기업인 박용만의 앞날을 응원한다.  

성태원 더스쿠프 대기자
lexlov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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