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이상한 노동 환상

비혼非婚과 미혼未婚이 개인의 선택이라는 주장은 사회적으론 무책임한 해석이다. 비미족(비혼ㆍ미혼족)의 선택은 경제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 경제 시스템 아래서 더 큰 빚을 만들어가며 3인, 4인 혹은 5인 가구가 될 것인지, 아니면 빚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자유로운 1인 가구가 될 것인지 강요받는다. 그래서 이 부분적인 자유를 소확행이나 워라밸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의문이다. 

비미족이 늘어난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결핍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비미족이 늘어난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결핍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부모로부터 자산을 넘겨받지 못한 사회 초년생들은 일단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지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런 이들이 만나 결혼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30~40대를 통째로 갈아서 만든 작은 집 한채, 그리고 느닷없이 다가오는 소득의 절벽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른다. 이런 당연한 미래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꿈을 꾼다는 것조차 불경스러워 퇴사라는 옵션조차 없는 삶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2019년 8월 전국 417개 대학을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하반기와 2019년 상반기에 학자금 대출을 이용한 대학생 수는 46만2672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만명 가까이 늘어났다. 전체 재학생 중에서 학자금 대출을 이용하는 학생의 비율은 13.9%였다.

학자금 목적을 제외하고 대학생들이 은행권에서 받은 대출금은 2018년 말 이미 1조원을 넘겼다(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 이는 3년 전인 2014년 보다 무려 77.7%나 늘어난 금액이다. 대학생들의 빚 규모와 연체 건수는 그 이후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취업포털 사람인ㆍ잡코리아 등의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신입 채용에 응시한 지원자의 42.0%가 30대 이상이었다. 그런 30대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중소기업(39.9%)과 중견기업(32.6%)에 취업한다. 2020년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 연봉은 4060만원이었지만, 중소기업 신입 평균 연봉은 2730만원이었다. 늦게 일을 시작해 더 적은 연봉을 받는 경우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저축은 사치에 가깝다.   

신한은행은 ‘2018년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에서 “직장인의 26.0%가 노후 대비 저축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국인의 월평균 저축액은 26만원에 불과하다. 저축을 하지 않는 이유는 20대, 30대, 40대, 50대 모두 “돈이 없어서’였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워라밸(Work-Life Balanceㆍ일과 삶의 균형)의 시작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미래를 위한 저축을 포기한 우리들은 어쩌다 마음에 드는 필기구 하나를 사거나, 아침마다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는 정도의 확실하게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의 행복만을 가질 수 있다.

소확행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사회의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그 정도에서 만족하라고 강요받는 삶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시대의 미혼과 비혼들에게 소확행은 확실히 소비할 수 있는 정도의 숫자로 표시된 행복이다. 

충분히 저축하지 못해 등장한 소확행 

하지만 현실은 더욱 힘들다. 노동 시간을 줄였어도 혼자서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는 만큼 가사 노동은 더 늘어난다. 더구나 비혼과 미혼의 직장인들을 향한 과거의 편견도 여전히 작용한다. 바로 ‘일과 결혼했다’는 편견이다. 기존 학자들은 경력 관리를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비미족이 많다고 주장해왔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미디어 전공을 가르치는 로라 키프니스 교수는 2002년 「사랑에 반대한다」란 책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야심 찬 사람들의 (안정된 관계를 기피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은 아주 명쾌했고,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며 “그들은 자유로운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미래학자 대니얼 핑크는 2004년 자신의 저서 「새로운 시대가 온다」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1인 기업가들은 자신을 일에 완전히 쏟아붓기 때문에 이들의 성공 여부는 대기업에서 주는 혜택이 아니라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라고 주장했다. 

저출산의 원인은 변화된 청년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저출산의 원인은 변화된 청년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뉴욕대 사회학과 에릭 클라이넨버그 교수는 7년 동안 혼자 사는 1인 거주자 300명을 심층 인터뷰한 후 발간한 2012년 「고잉 솔로」라는 책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30대 중후반이 되면 왜 나는 아직 결혼 상대를 찾지 못했는지, 찾았다면 더 행복했을지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여전히 한국에선 “스타트업에서 일하려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거나 “장인匠人이 되려면 워라밸을 포기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노동 환상’이다. “스타트업에서 모든 것을 바쳐 일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모든 스타트업 종사자들에게 창업자들처럼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강압이다. 이런 삶을 살면서 결혼하고, 출산하고, 육아를 하라는 말은 그 주변에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9년 2월 발간한 ‘미혼인구의 결혼 관련 태도’라는 보고서의 결론은 이렇다. “결혼을 향한 인식, 배우자의 조건을 바라보는 태도에선 성별 차이가 확인되는 가운데, 청년이 처한 사회경제적 특성도 반영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사회의 미혼화는 저출산의 원인이라는 사회문제가 아닌 청년 삶의 변화라는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우리 사회 비미족(비혼 및 미혼)의 등장 시점을 대략 2000~2005년으로 볼 수 있다. 이 기간 20대 후반 여성의 미혼율은 40.1%에서 59.1%로 무려 20%포인트 상승했다. 30대 초반 남성의 미혼율은 5년 동안 28.1%에서 41.3%로 치솟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는 이 시기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급격히 상승한 시기로 정의한다. “2000년대 초는 여성의 학력 수준이 빠르게 높아지고 산업구조가 변동하면서 전문직 분야 등에서 여성, 특히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대졸 이상 학력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하지만 구인회 서울대(사회복지학) 교수는 최근 「21세기 한국의 불평등」이란 저서에서 우리나라 15~64세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2011년 기준 54.9%로 OECD 평균보다 7%포인트 이상 낮고, 70%를 넘는 북미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비미족의 등장은 2000년대 초반 

결혼 자체에 대한 생각도 부정적으로 흐르고 있다. 2015년 조사 결과에서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한 남성은 60.8%, 여성은 39.7%였다. 2018년 조사에선 긍정적 응답률이 남성은 50.5%로 10.3%포인트, 여성의 응답률은 28.8%로 10.9%포인트 낮아졌다. 

우리 사회가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 자신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노동 환상’을 계속 유지한다면, 결혼하는 한국인의 숫자는 해마다 줄어들 것이고, 근로자들은 워라밸이 사라져 번아웃으로 인한 퇴사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정연 더스쿠프 칼럼니스트
jayhan090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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