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❺
오해, 비방 판치는 시대
이순신의 강직 리더십 필요해

한쪽에선 대통령이 검찰이란 ‘충견’을 동원해 자신들의 대표에게 누명을 씌운다고 말한다. 대통령 쪽에선 ‘법과 원칙’이란 구호만 거듭 내세울 뿐이다.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역사는 정의로운 쪽을 선택할 것이다. 온갖 누명을 받았음에도 결백함을 끝내 밝혀낸 이순신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정쟁에 빠진 정치권이 민생을 돌보지 않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쟁에 빠진 정치권이 민생을 돌보지 않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양의 훈련원에서 8개월 동안 상관인 서익의 인사청탁을 거부하며 힘겹게 지내던 이순신은 1579년 10월 충청병사(병마절도사의 약칭·무관 외관직 종2품)의 군관으로 발령났다. 충남 해미로 부임한 순신이 기거하는 숙소 안.

거기에는 베개와 이부자리, 옷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어느 자리에 있든 이순신은 공직자로서 늘 청렴결백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급료로 받은 곡식 몇 달 치를 지역 주민들에게 전부 나눠줬다는 기록도 있다. 

충청병사 군관 생활을 한 지 9개월째가 되던 1580년 7월. 순신은 전라도 발포진(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수군만호(종4품 무관)에 임명됐다. 해상 함대 장수로의 첫번째 발걸음이었다. 이때 순신은 군기軍器를 수선하고 병선을 개조하는 데 힘썼다. 전술적 운용을 편리하게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순신의 훈련원 시절 인사청탁 거부로 모멸감을 느꼈던 서익이 모함을 했다. 당시 전라감사 손식孫軾은 자신과 교분이 두터운 서익의 무고誣告를 믿고 트집을 잡기로 했다. 순신을 불러 “팔진도八陣圖를 강의하고 육화진도六花陣圖를 그려서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순신은 제갈량의 팔진을 막힘 없이 설명하는 한편 붓을 잡아 이정李靖의 육화진도를 그려냈다. 필법이 정묘하고 사려가 신속하다 보니 오히려 보는 관리들 모두가 놀랐다. 트집을 잡아 순신을 파직하려 했던 손식이 크게 놀라 태도를 바꿔 오히려 순신을 우대해줬다.

안타까운 ‘괘씸죄’ 쌓여가고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돼 이순신은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만호직(종4품)으로 발령받았다. 여기서도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꽤 있다. 음악에 취미가 있기로 유명했던 전라좌수사 성박成鑮은 고흥 관아에 있는 오동나무가 자랄 만큼 자랐다는 얘기를 듣고, 거문고 재료로 사용하겠다며 군관을 보내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순신은 “관청 객사의 나무는 관가, 즉 정부의 소유물이다. 사적인 물품을 만들려고 하는 명령은 따를 수 없다.”라며 군관을 돌려보냈다.

오동나무 베길 포기한 군관은 성박에게 돌아가 순신의 말을 그대로 보고했다. 성박은 내심 ‘아니, 이 자가 윗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라며 괘씸하게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순신의 공명정대가 꺼림직했던지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로 따끔하게 혼내 볼 잔꾀를 내봤지만 이론이면 이론, 실기면 실기, 문무로 철벽 무장돼 있던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떠나고 후임으로 이용이 내려왔다. 이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미 순신을 둘러싼 소문을 들어본 터라 이용은 순신에게 골탕을 먹일 심산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관할 5포(사도·여도·녹도·발포·방답)를 불시에 점검했다. 

[그래프=더스쿠프, 사진=뉴시스]
[그래프=더스쿠프, 사진=뉴시스]

다른 네곳에서는 군사의 결원이 수십명에 이르렀지만 오히려 순신이 맡고 있는 발포진은 워낙 군령이 엄숙해 불참한 군사가 불과 세명뿐이었다. “오냐, 기회가 왔구나! 자네 한번 맛 좀 봐라.” 이용은 다른 네곳의 문제는 불문에 부치는 대신 발포진에만 누락이 있다는 점을 죄목으로 들어 조정에 장계를 보냈다.

이용의 용렬한 심정을 짐작한 순신은 재빨리 사람을 시켜 다른 진의 누락된 군사의 성명을 기록한 원본서류와 증빙서까지 구해와 이용에게 따졌다. 크게 놀란 이용은 재빨리 사람을 보내 장계를 찾아오도록 하는 한편 순신에게 화해를 청했다. 이순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이용은 그 뒤에 전라감사와 좌수사와 모여 어떻게든 이순신에게 낮은 평가 점수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전라도사인 조헌趙憲이 분연히 인정하지 못해 이렇게 옹호했다. “적을 막고 군사를 다스리는 성적이 전라도에서 이순신이 으뜸이거늘 차라리 열진의 변장들을 다 하등에 둘지언정 이순신을 폄훼하는 것은 불가하오.” 

그 언사가 공정하고 엄숙한 탓에 전라좌수사 이용도 어찌하지 못했다. 순신이 이 소문을 듣고 세상살이의 험난함을 탄식하는 시를 읊기도 했다.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용은 결국 이순신의 성품과 능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순신은 결국 파직을 당하고 만다. 1581년 1월 서울에서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이 발포진에 내려와 군기軍器 점검에 나섰다. 하필 이때 순찰사가 이순신의 훈련원 시절 병조정랑 이익이었다. 인사 청탁을 하다 무안을 당해 앙심을 품기도 했지만 워낙 성질이 고약했던 터라 온갖 트집을 잡아 이순신을 벼랑으로 몰아붙였다. 

지금의 연대장급 계급에서 파직당한 이순신은 고향에서 1년 넘게 백수로 지내다 1581년 4월에 중위급인 훈련원 봉사직(종8품)으로 직위가 떨어진 상태로 복직됐다. 그 무렵, 서애 류성룡과 율곡 이이 두 사람은 어느 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율곡이 서애에게 물었다.

강직함이 불러일으킨 질투

“우리나라가 남왜南倭와 북호北胡 사이에 있어 때때로 변경이 시끄러우니 만일에 대란이 일어난다면 누구를 대장으로 삼아 난을 평정하겠소? 대감은 혹시나 대장감이 될 만한 사람을 보았소?” 서애는 “제가 어찌 알겠소마는 이순신과 권율權慄 같은 이가 장군감일까 하오”라고 답했다.

율곡이 “권율은 권정승의 아들이란건 아는데 이순신은 그 누구요”라고 묻자 서애는 이렇게 답했다. “이순신은 대감과 같은 핏줄입니다. 지금은 하급관리에 머물러 알아보는 사람이 없지만 용기와 지략을 겸한 인물인 건  틀림없습니다.”

류성룡의 말대로 이순신과 율곡은 덕수 이씨다. 따지자면 19촌 사이로 율곡이 나이로는 아홉 살 많았지만 이순신이 율곡보다 한 항렬 높은 아저씨뻘이다. 이순신의 좌천 소문이 돌고 돌아 서울 한양으로 퍼지면서 이조판서 율곡의 귀에 들어갔다. 이이는 류성룡에게 들은 바가 있어 이순신과 만나게 다리를 놓아 달라고 주문했다.

여기서 잠깐 요즘 이야기를 해야 할 듯하다. 정치권이 시끄럽다. 민생을 돌보긴커녕 정쟁만 일삼고 있어서다. 그 중심엔 야당 대표도 있다. 거대 야당 쪽에선 자신들의 대표를 향한 수사를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여당 쪽에선 이런 야당을 향해 ‘자신들의 대표를 지키기 위해 장관과 민생예산을 볼모로 삼았다’ 꼬집는다. 

어느 시대든 정치권에선 오해와 비방이 판을 쳤다. 하지만 역사는 그것의 진실을 언제든 밝혀냈다. 지금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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