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❹ 

거대 야당 대표를 둘러싼 의혹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어느 장관의 해임 문제도 점입가경이다. 여야는 예산안까지 처리를 미루면서 대치하고 있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해’라는 말을 던지는 여야 정치권에 정말 ‘민생’이란 단어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에게 ‘청백리 사상’ 따위를 기대하는 것도 이젠 무리일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이순신 같은 지도자는 없는 걸까. 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네번째 편이다. 

정쟁에 빠진 여야 정치권이 민생을 돌보지 않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쟁에 빠진 여야 정치권이 민생을 돌보지 않고 있다. [사진=뉴시스]

약관의 나이에 경전의 깊은 뜻을 이해하며 통찰력을 키워 온 이순신은 진작에 무관 공직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세 무렵 금강산 깊은 산중에서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지만, 결혼 후 장인에게 받은 영향도 없지 않았다. 기록을 보면, 순신은 결혼 후 1년이 지난 22세부터 무관벼슬 시험 준비에 본격 나섰다.

순신의 의지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도 꺾지 못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인 건천동에서 시작된다. 순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 군대놀이를 하던 건천동에는 그보다 나이가 세살 많은 류성룡도 살고 있었다.

순신의 둘째 형 요신은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다. 형을 따라 퇴계의 집 문턱을 자주 넘나들었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맺었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순신을 추천할 때 “신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기에 그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순신의 자질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류성룡은 애당초 문관 벼슬길로 나서길 권했다. “그대의 재능으로 보아 무를 버리고 문을 좇으면 일찍부터 청요대각에 이름이 빛나리라.”[※참고: 청요대각은 좁게는 사헌부와 사간원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홍문관 또는 규장각을 더하기도 한다.]

그러자 순신은 “장부 어찌 평생토록 벼루, 붓, 책에 종사하리오. 임금을 모시는 도는 문무가 다르지 않으니, 저 옛날 한신과 제갈량이 무로써 빛냈듯 저도 그 길을 가겠소”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작정한 만큼 준마를 타고 활시위를 당기며 열심히 무예를 연마했다.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산천의 형세와 바다의 깊은 곳과 얕은 곳, 크고 작은 섬들의 위치도 살펴보곤 했다. 그러면서 당시 백성들의 아픔도 통찰했다. 

이렇게 6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침내 1572년 8월, 28세 순신은 조선시대 무과 관청인 훈련원의 시험에 처음 도전했다. 장수의 꿈을 품고 무과 별시에 응시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시험 도중 타고 달리던 말이 실족하며 고꾸러지고 말았다. 순신도 따라 낙마하면서 왼발이 부러졌고 피를 많이 흘렀다. 

그러나 순신은 홀연히 한발로 일어섰다. 조금도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길가의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긴 후 상처를 동여맸다. 그리곤 다시 말을 잡아탔다. 포기하지 않고 시험을 끝까지 치러낸 그의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많은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도 결과는 낙방. 애석하게 ‘미역국’을 마시고 말았다.

4년 후 병자 1576년 1월. 32세의 이순신은 식년(과거 보는 시기를 정한 해) 무과시험에 도전해 최종 합격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일단 무예시험을 통과한 순신이 마지막으로 ‘구두필기시험’ 격인 「황석공소서」를 강의했다.[※참고: 황석공소서는 BC 218년 장량이 시황제를 습격했다가 실패하고 은신하고 있을 때 황석공이라는 신비한 노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책이다.]

그러던 중 시험관이 질문을 던졌다. “책에 ‘한나라 장량이 적송자(비를 다스리는 신선)를 쫓아 놀았다’ 하였으니 그러면 장량이 과연 죽지 아니하고 신선이 되었단 말인가.”

순신이 답했다. “사람이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음은 천리의 근본입니다. 주자朱子의 「강목(자치통감 294권을 주자가 소제목을 달아 59권으로 정리한 책)」에 ‘임자 6년에 장량이 세상을 떴다’ 했으니 어찌 신선이 되어 죽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신선에 가탁한 일일 것입니다.” 

시험관들은 놀라 서로를 바라보며 “이 사람은 무예에만 정통할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에 많은 포부가 있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급제로 영화로운 창방 행차(과거 합격자 거리 행진)에 나선 순신. 잔나비의 팔, 곰의 허리에 팔척 장신. 용의 수염에 범의 눈썹, 표범의 머리, 제비의 턱, 푸짐한 코, 봉황의 눈을 지닌 그의 풍채는 준수하고 자태는 당당했다. 

부모님께 ‘급제’의 기쁨을 알리는 인사를 드린 후 소분참배(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조상의 분묘에 가서 무덤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리는 절차)를 위해 아산으로 향했다. 그때 선산 정정공 묘소에 서있던 망부석 하나가 세월이 오래된 까닭인지 땅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수행하던 하인 여러명이 석상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워낙 무거워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순신이 혼자 번쩍 들어올리니 보는 사람들 모두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순신이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은 함경도 동구비보(삼수갑산으로 잘 알려진 삼수라는 고을)로 직책은 말단 공무원인 권관(종9품)이었다. 당시 함경도 감사 이후백은 활쏘기 대회를 자주 열었는데, 순신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순신은 이후백에게 많은 칭찬과 신뢰를 얻었다. 

마침내 문무로 자질 인정받아

권관 생활 3년이 지난 후 1579년 2월. 자신의 출생지인 서울 건천동에 위치한 훈련원의 인사과 직책인 봉사(종8품)로 임명됐다.  이때 무관 인사권을 지닌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승진시켜 달라는 인사 청탁을 넣었다. 상관의 지위를 악용해 순신을 억압했지만 굽히지 않고 당당히 거부했다.

이순신은 무예에 정통했지만, 문필, 병법도 뛰어났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무예에 정통했지만, 문필, 병법도 뛰어났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걱정하는 이가 많았다. 이때 순신의 나이 35세. 부인 방씨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회는 13세, 둘째 예는 9세, 막내 면은 3세였다. 대쪽 같은 순신의 성품은 당시 병조판서 김귀영의 귀에 들어갔다. 김귀영은 소실이 낳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출가할 나이였다. 꽃 같은 얼굴, 달 같은 자태, 구름 같은 머리카락, 눈꽃 같은 피부의 절대미인으로 소문도 자자했다.

병조판서의 문객 중 한 사람이 이렇게 귀띔해준다. “비록 하급관료이긴 하지만 인격, 무예, 용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문필과 병법 또한 수준급입니다. 대감이 바라는 사윗감으로 제격이 아닐지요.”

병조판서가 보낸 중매자는 순신에게 “병판 김공이 그 사랑하는 딸을 그대에게 소실로 주고자 함은 그대의 영풍을 흠모함이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순신은 “권고는 감사하오만, 벼슬길에 갓 나와 아직 공업을 세우지 못한 제가 어찌 먼저 권문세가와의 인연에 의탁할 수 있겠소”라며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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