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❾
감출 게 없어 두려움도 없던 이순신
검찰 출두한 야당 대표 옆 측근들
‘이순신 기백’ 있었다면 어땠을까

죄가 없으면 두려울 것도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당당하게 마련이다. 이순신이 그랬다. 젊은 시절 그는 수없이 많은 의심을 받았지만 언제나 당당했다. 모반에 연루된 누군가의 집에서 자신이 쓴 서신이 발견됐을 때에도 “안부를 묻는 편지가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라면서 되레 호통을 쳤다. 얼마 전 검찰에 출두한 야당 대표에게 이런 기백이 있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든다. 이순신 리더십, 아홉번째 편이다. 

야당 대표가 최근 검찰에 출두했다.[사진=뉴시스]
야당 대표가 최근 검찰에 출두했다.[사진=뉴시스]

정읍현감과 태인현감을 겸임하던 시절에 전라도사 조대중曺大中이 서신으로 순신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조대중의 호는 정곡鼎谷으로 어질고 반듯한 선비라 순신과도 친분이 각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순신 역시 회답을 했는데, 그 뒤 조대중은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 무렵, 순신은 전라도 차사원(중요한 임무를 받고 다른 곳으로 파견가는 관원)으로 상경하는 길에 우연히 친분이 있던 금오랑(의금부 도사의 별칭)을 만났다. 그가 순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조대중의 가택을 수색하다 그대의 서간이 압수됐지만, 내 그대를 위해 그 서간을 빼어 버리려 하오.” 그러자 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조대중이 내게 편지를 보냈기에 내가 답서를 보냈소. 하지만 서로 안부를 물을 따름이었고, 다른 말이 없었소. 나랏일로 압수한 서류를 사사로이 빼어 버림이 내 마음엔 편치 아니한 일이오.” 금오랑은 순신의 공명정대한 마음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우의정 정언신도 9촌간이란 이유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순신이 함경도에 재직할 때 병조판서였던 정언신은 순신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건강을 염려하고 챙겨주던 인물이다.

정언신이 옥살이를 한다는 소식에 순신은 주변의 만류에도 당당하게 면회를 가겠다고 나섰다. 감옥으로 가보니 간수들이 모여 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노닥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순신은 “유무죄를 떠나 일국 대신이 옥중에 있는데, 그대들이 풍악놀이 하듯 근무태만하면 되겠는가.”

이 말을 들은 간수들은 사과하고 자리를 파해 버렸다. 조용히 면회만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간수들의 모습에 호통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신은 이처럼 모든 일에 당당했다. 잘못한 게 없으니 감출 것도 없었고, 감출 게 없으니 두려워할 필요 또한 없었다. 


얼마 전 야당 대표가 검찰이 만들어 놓은 포토 라인에 섰다. 순신처럼 ‘당당하게 혼자’ 맞섰으면 어땠을까란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주변에 ‘측근’이 너무 많았다. 그가 정말 당당할지는 따져볼 일이지만 말이다. 

다시 순신 이야기를 해보자. 순신이 후방 정읍 현감으로 옮겨 사또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사실 류성룡의 배려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방 야전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 이정과 형들 두명이 별세했다. 그래서 순신은 조카들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살림이 넉넉지 못한 순신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류성룡이 힘을 써 후방으로 배치한 것이다.

[사진|뉴시스, 자료|더스쿠프]
[사진|뉴시스, 자료|더스쿠프]

순신이 정읍 사또로 부임할 때 자신의 가족과 모든 조카를 데리고 임지로 내려갔다. 그러자 혹자는 ‘남솔(제한 식구 이상을 임지로 데리고 가는 것)이 불가하다’며 비난했다. 이 말을 들은 순신은 “내가 비록 남솔했다는 비난을 들을지언정 차마 의탁할 곳이 없는 두 형의 아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며 탄식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감탄해 모두들 입을 닫았다.

짧지만 현감 시절 순신은 모처럼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지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590년 7월 조정은 순신에게 고사리진(평북 강계군 관내의 진) 병마첨사(종3품 무관)를 제수해 다시 변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간원에서 “수령을 너무 자주 옮긴다”는 이유를 들어 탄핵했다. 8월에는 정3품 당상관으로 만포진(평북 강계군 압록강변의 진)의 수군첨사로 임명했더니 또 대간들이 “너무 급히 벼슬을 올린다”고 탄핵했다. 그래서 순신은 종6품 정읍현감에 머물러 있었다. 이면에 남인 류성룡의 천거에 서인들이 반대가 있었던 것이다.

영특했던 류성룡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순신을 요직에 앉히려 꾀를 냈다. 1591년 2월이 되자마자 순신을 진도珍島군수(종4품)로 발령내고,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신안 가리포진 수군첨사로 전임했다. 또 가리포진으로 출발조차 못 한 2월 13일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했다. 사간원에서 딴지를 걸 수 없게 재빨리 연속 발령을 내버린 것이다.

순신의 이런 파격적인 승진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 나라의 정세가 비상시국이었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당파싸움을, 밖으로는 일본을 경계해야만 했다. 전국시대를 넘어 통일시대를 만들어버린 왜구의 정세를 보니 전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판이었다. 

선조는 대신들을 모아놓고 전쟁에 나설 대장감이 될 인재들을 천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우의정 류성룡은 순신과 권율 두 사람을 추천하고, 판부사 정탁은 순신, 곽재우, 김덕령 3인을 추천했다. 영부사 정철은 이억기, 신립, 김시민을 추천했다. 

류성룡은 임금에게 “국가의 장래를 위해선 순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강추’ 정도가 아닌 ‘혼신의 힘’을 다해 설득한 끝에 ‘낙점’을 받아냈다. 일사천리로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麗水에 도착한 순신은 불혹을 훌쩍 넘어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47세였다. 

순신은 진작부터 일본이 출병해 조선을 침범할 것으로 확신했다. 어느 날 관할지역 해안을 점검하는데 지난 3~4일 계속 동풍이 크게 불어 온 까닭인지 배 만드는 나무 조각과 톱밥이 해안을 덮고 있었다. “필시 병선을 크게 건조한 흔적이다.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여세를 몰아 바다를 건너 우리를 치려 하는구나.” 심상치 않은 전조에 순신은 해변 근처에 거주하다 포로로 일본에 수년간 잡혀있었던 공대원孔大元이란 사람을 불러들였다. 일본의 사정과 군제軍制의 강약, 병기의 종류 등에 대해 낱낱이 파악했다.  

이순신은 잘못한 게 없으니 감출 것이 없었고, 감출 게 없으니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이순신은 잘못한 게 없으니 감출 것이 없었고, 감출 게 없으니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또 본영과 더불어 소속 5관 5포의 병기와 군량, 장졸의 충실 여부를 일일이 검열했다. 한편으론 각지의 철공鐵工을 불러모아 철삭鐵索을 만들게 하고 해협 요소마다 가로질러 막았다. 만일 적선이 다가오면 철삭을 감아올려 통행을 차단할 요량이었다.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한 물살을 이용해 적선을 전복시킬 계략도 세웠다. 평상시에는 철삭을 도로 물밑에 잠기게 해서 백성들의 어선이 통행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했다.

할 일은 너무도 많았다. 바다의 벌흙과 아궁이의 흙을 구워 만든 염초焰硝 수천 근에 버드나무 숯, 메밀짚을 태운 재와 유황을 합쳐 화약을 제조했다. 병선도 살폈다. 좌수영 병선은 대맹선大猛船이 2척, 중맹선中猛船 6척, 소맹선小猛船이 2척,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 7척으로 모두 17척이었다. 

명색은 갖췄지만 절반은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고, 배의 몸체는 물론 노·닻·돛 등 부품들도 부실했다. 군함의 수리와 개조 규정도 있긴 했지만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순신은 엄밀히 검열하여 쓸 것 못 쓸 것을 분간하면서 해군과 군함의 개혁안을 세웠다. 특히 모든 크고 작은 병선을 전부 새로 만들기로 했다. 관할지역 5관 5포의 이름난 장인들을 총출동시켜 설계도를 만들고 조선造船 공사에 착수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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