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❽
악의적 무고로 백의종군한 이순신
고위 공직자 병풍 치고 책임 회피
애먼 아랫사람만 밥줄ㆍ목숨줄 끊겨

참 이상하다. 대형 참사가 터졌는데, 상부 사람들은 온전하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만 수사를 받거나 구속된다. 현장 관계자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만 잘못이 있는 건 아닐진대, 왜 이런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걸까. 고위 공직자의 무고와 책임 회피에 벼랑에 몰렸던 이순신을 통해 그 이유와 답을 찾아보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고위 관계자가 책임을 지는 일은 드물다.[사진=뉴시스]
어떤 일이 벌어지든 고위 관계자가 책임을 지는 일은 드물다.[사진=뉴시스]

함경도 병마사 이일은 순신에게 ‘패전사유를 써서 올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억지 자백서를 받아 조정에 패전했다고 보고한 근거로 내놓을 심산이었다. “제가 녹둔도를 수비하는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해 증병해 달라고 여러번 요청했지만, 시종일관 모르는 척하지 않았소. 증원을 요청한 서류 원본이 증거로 엄연히 있는데, 만일 조정에서 이 일을 알면 분명 내게만 죄를 묻지 않을 것이오. 또 적의 맹장들을 쳐 베고, 잡혀갔던 군민 60여명을 구해왔거늘, 어찌 패군이라 하시오. 이를 본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혼자 우기면 되오?”

순신의 당당한 언변에 이일은 속으로 뜨끔했다. 의기가 한풀 꺾였는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순신을 다시 하옥하라”는 명령만 내렸다. 당장 자기 맘대로 형벌을 내리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임금 선조는 “장형을 집행한 이후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고 명했다. 순신의 첫번째 백의종군이다. 당시 선조의 리더십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가의 시스템이 가동되는 가장 으뜸의 목표는 ‘국민의 안위’다. 이 대목에서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 참사가 오버랩됐다.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압사’를 언급한 신고가 잇따랐다. 비명이 담긴 전화도 있었다. 

하지만 공권력은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158명이 목숨을 잃었다. 현장의 공무원들은 상부에 증원을 요청했으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위기 대응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높은 자리의 그 사람들은 서로 병풍을 둘러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책임소재를 묻는 국정감사 자리에서는 “웃기고 앉아있네”라며 황당한 제스처까지 보여주고 만다. 대신 하급 공무원들에게 책임이 전가됐고, 이로 인해 일부는 목숨까지 버렸다.


선조는 순신이 적진 속에 깊이 들어가 잡혀간 백성과 병사 60여명을 구출해왔다는 점을 간과했다. 아니, 백성의 안위는 입에서 나오는 말일 뿐, 무감성 또는 무감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구출한, 공직자의 책무를 몸 바쳐 충실히 지킨 순신 대신 무고와 책임회피에 급급한 고위 공직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 결과, 순신은 엉덩이를 까서 매를 맞아야 하는 치욕을 당하고 깃털 같은 하급관직마저 박탈당했다. 

백의종군을 하던 1587년의 12월, 두만강 건너편 시전時錢이라는 마을에서 귀순한 오랑캐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북쪽 변방 여러 곳을 침략했다. 이때 순신은 경원慶源, 온성穩城, 부령富寧의 수령들에게 자신이 선봉에 나설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순신이 비록 파직됐지만 그의 용략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각 지역 수령은 그의 억울함을 알기에 순신에게 선봉을 맡기고 정예병 500명을 내줬다.

[자료 | 더스쿠프, 사진 | 뉴시스]
[자료 | 더스쿠프, 사진 | 뉴시스]

순신은 차가운 삭풍을 무릅쓰고 두만강 얼음 위를 건너 시전 부락에 도착했다. 밤이 깊은 시간이어서 적들은 잠에 빠져 있었다. 불시에 소굴에 들어가 적장 3인을 풍우같이 베고 유유히 돌아오니 적들이 잠을 깨어 일어나 군사를 정돈하고 순신의 뒤를 쫓아왔다. 순신은 험한 골짜기로 유인해 매복시켜둔 아군으로 그들을 격파했다. 이로써 시전의 어려운 상황은 단번에 평정됐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순신은 백의종군을 면제받았다. 그렇다고 당장 복권이 되지 않은 터라 순신은 충청도 아산 백암리 자택에 머물렀다.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던 순신은 이렇게 탄식했다. 

“대장부를 국가에서 쓰면 충성을 다하여 목숨을 바칠 것이요, 쓰지 아니하면 구름 걸친 하늘 아래 숲에서 밭갈기와 달 비치는 여울가에 낚시질하기를 일삼을 수밖에 없은 일이요, 그렇다고 본래부터 품은 뜻을 굽혀 권귀한 사람에게 아첨해 덧없는 세상의 허영을 엿본다면 이는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다.” 

순신이 백암촌에 은거하던 1588년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동인과 서인의 다툼이 맹렬했고, 정치는 문란하고 인심은 천박했다. 아부하는 자는 등용하고 정직한 사람은 미움을 받았다. 순신처럼 큰 공을 세웠지만 시기모함에 빠지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6월이 되자 조정에서는 문무를 겸비한 장수 자격이 있는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류성룡, 정탁, 정철 등 대신들은 순신을 비롯, 권율, 김시민, 신립, 이억기, 곽재우, 김덕령 등 7명을 적임자로 추천했다.

불차탁용(계급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히 벼슬에 동원) 방식으로 신립을 1순위, 순신 2순위, 이억기 3순위로 꼽았다. 하지만 순신만 백의종군했다는 이유로 서명(고려ㆍ조선시대에 관리의 임용이나 법령의 제개정에는 대간의 서명을 거쳐야 했다)을 받지 못해 결국 하차했다.

1589년 2월. 45세의 순신은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부름을 받았다. 부관에 해당하는 행수군관(군관 중의 우두머리)으로 부임한 순신은 이어 전라도 조방장(주장을 도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으로 임명됐다.

순신이 조방장으로 이광을 수행하다 순천부사 권준權俊을 만났을 때였다. 권준은 두 사람을 극진히 영접하며 술좌석까지 마련했다. 술기운 탓이었는지 권준은 “귀하 같은 영재가 이처럼 떠돌아다니니 탄식할 일이오. 순천은 큰 고을이니 귀하 같은 분이 내 자리를 대신해 순천부사가 되는 것이 좋겠소”라며 순신을 치켜세웠다. 순신은 아무 대답이 없이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권준의 실언을 일소에 부치고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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