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❿
국민연금 고갈 논란에 개혁 선언
개혁론엔 구체적인 전술 있어야
국정 책임자는 청사진 갖고 있나

사물이나 현상을 환히 꿰뚫어 볼 수 있어야 미래 예측이 가능하고, 또 구체적이고도 슬기로운 대응방안을 내놓을 수 있다. 기업인, 공직자, 정치인 할 것 없이 리더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재능이다. 이순신이 보여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지혜는 그의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좋은 리더는 좋은 밑그림을 갖고 있다.[사진=뉴시스]
좋은 리더는 좋은 밑그림을 갖고 있다.[사진=뉴시스]

조선의 남해 바다를 지키는 4곳의 수군 본영은 임금이 남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구별했다. 따라서 가장 오른쪽이 전라우수영(해남)이고, 계속 왼쪽 방향으로 전라좌수영(여수), 경상우수영(거제)이다. 맨 왼쪽이 경상좌수영(동래)이다. 각각 이억기, 순신, 원균, 박홍 등 네 명이 수군절도사로 임명됐는데 이들 중 왜군의 침입을 미리 내다보고 전쟁에 대비한 이는 순신뿐이었다.

전라좌수영 사령관 순신이 처음으로 군졸의 인원을 파악해보니 1800여명에 불과했다. 이중 건장한 자는 절반에도 못 미치고 나머지는 노약자나 군적에 이름만 있을 뿐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순신은 장정과 기술자를 선발해 병력을 3배 이상으로 늘렸다. 동시에 충의와 신의로 훈련하고 보살폈다. 

대신 훈련·물자조달·행정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군령을 어기거나, 전쟁 준비가 미흡한 경우엔 엄하게 다스렸다. 그러자 군대의 질서를 차츰 갖췄고, 장병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나라를 위해 죽기로 싸울 마음이 크게 일어난 것이다.

1598년 순신이 전사한 후 발간된 「선조실록」에도 “순신은 기율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어느 하나 빠짐없이 준비했다 하더라도, 바다에서 싸우려면 역시 전투선과 그 운용전술이 뛰어나야 했다.

1555년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조선 수군은 많은 약점을 노출했다. 그러자 그해 명종의 지시로 판옥선을 개발해 이를 주력 함선으로 삼았다. 순신은 당장 판옥선을 건조하는 데 전력투구했다.[※참고: 판옥선은 배의 네 구석에 기둥을 세우고 사면을 가린 다음 마룻대를 얹어 지붕을 덮은 2층 구조의 배를 말한다. 노를 젓는 병사들은 아래층에, 공격을 담당하는 병사는 위층에 배치한다.]

장병들은 군역에다 함선 건조하는 노동을 감내해야 했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순신은 북방의 야전생활, 백의종군 등에서 통찰한 혼연일체와 동고동숙同苦同宿의 현장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덕분에 4곳의 수영 중 재정·인력·물자가 가장 취약했던 전라좌수영은 24척가량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노를 젓는 격군들도 선발해 명령에 따라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거듭 훈련했다. 갑판 위에서 화살을 쏘는 궁병들에겐 대회를 열어 명사수로 단련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3개월 동안 전라좌수영 본영에서는 30회의 활쏘기 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순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 수군이 왜군에 비해 백병전에 취약한 까닭에 적이 판옥선에 옮겨 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어찌하면 좋을까?” 몰입沒入 끝에 드디어 묘안이 떠올랐다. 실제로 순신이 붓을 들어 정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큰 줄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판옥선에 지붕을 덮어 왜군의 등선을 막는다. 둘째, 지붕에 쇠못과 칼을 박아 2중으로 방어한다. 셋째, 화공에 대비해서 지붕에 철갑을 두른다.

결국 순신은 몸소 도편수 역할을 하며 특별한 병선을 새로 건조했다. 그 형상은 용의 머리가 달린 거북과 같다. 세계 최초의 철장갑선이었다. 이 병선은 진통 끝에 만들어졌다. 순신의 계획에 따라 거북선을 만들고 있을 때 나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새 수사가 어리석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수사의 측근 장수인 우후(각 도 절도사에 소속된 관직) 김운규金雲珪마저 “경험 없는 새 수사의 터무니없는 장난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새로 건설하는 거북선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병판에게 보고해 새 수사가 파직당하는 모양을 보리라”며 씩씩거렸다. 

[사진|뉴시스, 자료|더스쿠프]
[사진|뉴시스, 자료|더스쿠프]

이 지점에서 오늘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 운영 책임자는 최근 역대 정부에서 시도하지 못한 ‘연금’을 개혁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민의 인기를 받지 못하더라도 ‘기필코’ 해내겠다는 의지도 불살랐다. 국민연금의 고갈론이 확산하고 있는 지금, 국정 운영 책임자가 연금개혁론을 설파한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다만, 개혁론엔 구체적인 ‘전술’이 있어야 한다. 개혁은 선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국정 운영 책임자에게 ‘구체적인 청사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갑론을박만 벌이고 있는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어떤 솔루션을 만들어낼지 불투명한 데다, 공적연금 논의는 여전히 답보상태여서다. 

그럼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거북선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순신은 어떤 밑그림으로 어떻게 행동했을까. 측근 장수까지 삿대질을 했지만 순신은 공무를 마치고 나면 여지없이 배 짓는 감독을 했다. 그때에 배를 만드는 도편수 한대선韓大善은 순신의 지시를 받아 열심히 일하는 유일한 심복이며 동지였다. 그 외에도 사령관의 창조적인 ‘병선 대혁신’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녹도만호 정운鄭運뿐이었다. 나머지는 순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1591년 4월 12일. 거북선이 전라좌수영 앞바다에 처음 뜨는 날이었다. 거북선이란 희귀한 배가 물에 뜨는 걸 보겠다면서 좌수영 백성은 물론 각읍 각포에서 구경꾼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산덩이 같은 거북선에 달린 오색 기치는 바람에 나부꼈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때마침 조수가 밀려왔다. 큰 북소리가 울리자 아단단지(불을 뿜어내는 폭발물)가 터지고 그 속으로 무수한 화전火箭이 나와서 공중에 살별(혜성의 우리말) 흐르듯 날았다. 이 화전도 순신이 개량한 것이다.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적선에 불을 놓자는 게 목적이었다. 이런 아단단지의 소리를 신호로 수천명 수군이 줄을 끌어당기니 산덩이 같은 거북선이 바다 위로 나갔다. 배가 진수되자 군악이 울려퍼지고, 여기에 배를 만든 일꾼들의 춤사위가 펼쳐졌다. 

이순신은 몸소 도편수 역할을 하며 특별한 병선을 새로 건조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몸소 도편수 역할을 하며 특별한 병선을 새로 건조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과 수하 장수들, 그리고 병력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 자세를 취해보니 인원이 160명에 달했다. 대맹선에 탈 수 있는 군사가 최대 100명이고, 중맹선에 60~70명, 소맹선에 군사 30~40명인 걸 감안하면 대단한 병력이다.

노를 젓는 격군 40명이 20명씩 양편으로 갈라서 번갈아 노를 젓고, 72명은 각자 포혈(천지현자 총통銃筒을 배치한 곳)을 하나씩 책임진다. 여기에 36명은 포수의 번을 갈아드는 임무를 맡고, 나머지 12명은 거북 머리 안에 불을 놓아 거북의 입으로 독한 연기를 토하게 하는 책임과 취사 및 청소를 맡는 군사였다. 거북선은 중량 200근짜리 부천자총통과 150근짜리 지자총통, 50근짜리 현자총통 등 개량 화포로 무장했다. 

이윽고 거북선의 입에서 산과 바다를 진동하는 큰소리가 났다. 뒤를 이어 시커먼 연기가 나더니 대완구大碗口의 대포 소리와 함께 화광이 충천하며 무수한 화전이 살별같이 바다 하늘로 쏟아져 나갔다. 그러자 좌우 양편에 걸린 20개의 노가 일시에 물을 당기니 크나큰 거북선이 바람과 물결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바다로 내달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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