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파트2] 명동에서 엔저시대 읽다

엔저시대가 열리면서 국내 관광업계가 타격을 입고 있다. 특히 일본인 관광객에 의존하던 명동상권이 위태롭다. 한편에선 왕서방들이 돈을 펑펑 쓰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엔저현상을 통해 국내 관광업계의 현주소를 읽어봤다.

▲ 엔저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주요 고객이었던 일본인 관광객이 줄어들어 명동거리가 썰렁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새롭게 단장한 명동 지하상가. 한 보세 구두 가게에서 일본 손님과 상인이 계산기를 든 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이 엔화로 구두값을 지불하겠다고 하자 상인은 고개를 저으며 계산기를 꺼낸다. “크레딧카드 2만1000원, 현금 2만원, 엔화는 노.” 곧바로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엔화는 받지마. 계산하기도 힘들고 더 떨어질지도 몰라.”

 
일본인 관광객은 온갖 애교를 떨며 1000원이라도 깎아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결국 이 일본 관광객이 신용카드로 2만1000원을 지불하면서 거래가 일단락됐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한푼이라도 더 깎으려는 일본인 관광객과 엔화를 받지 않으려는 상인의 기싸움이 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떡해서든 엔화를 받으려는 상인이 많았다. 한때는 100엔에 1500원까지 치솟을 정도로 엔화가치가 높았다. 콧대 높던 엔화 강세는 계속될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원ㆍ엔 환율이 1500원까지 치솟았던 엔화는 지난해 10월 1300원대로 내려앉더니 올 1월에 들어 1100원대로 떨어졌다. 엔고시대가 끝나고 ‘엔저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엔저에 마사지 업체 매물로 나와

엔저현상은 일본 정권 교체와 관련이 깊다. 지난해 12월 당선된 아베 총리는 집권하자마자 “일본중앙은행의 윤전기를 무제한으로 돌리겠다”고 말했다. 돈을 풀어 엔화 약세를 유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베의 통화정책은 국내 관광산업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본 신주쿠에 거주하는 한 교민은 “최근 엔저현상으로 해외여행을 자제하는 분위기”라며 “한국여행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실제 국내 전체 관광객의 약 30%를 차지하던 일본인 관광객은 수개월 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초부터 8월까지 늘어나다가 9월에 마이너스를 찍은 후로 감소폭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일본인 관광객수는 22만 7227명으로 2011년 12월 29만90 69명보다 24% 줄었다.

▲ 최근 리뉴얼 후 재개장한 명동역 지하상가 역시 한산한 모습이다.
일본인 관광객의 감소는 명동 상권 몰락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음식점•마사지 업종에는 경고등이 켜졌다. 호황을 누리던 호텔업계에도 위기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명동 지역 호텔의 경우 일본인 관광객의 객실 예약률이 90%에 달했기 때문이다.

명동역 근방에 있는 프린스 호텔의 최근 객실 예약률은 4분의 1가량 줄어들었다. 이랑걸 프린스호텔 객실판촉 팀장은 “엔화가치가 떨어지면서 일본인 객실 예약 비중이 80~90%에서 최근 50~60%까지 줄어들었다”며 “더 이상 일본인 관광객에만 의지할 수 없어 앞으로는 동남아•북미 관광객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형호텔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롯데호텔은 지난해 4분기부터 일본인 투숙객이 전년동기비 30%씩 줄기 시작했다. 웨스틴조선호텔은 최근 두달 새 일본인 고객이 지난해보다 10~15% 줄어들었다. 매물로 나오는 명동지역 마사지 업체도 많다. 지난해 중순까지만 해도 명동 지역 내 마사지 업체수는 100개가 넘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지만 최근에는 부동산 매물로 나오거나 업종 변경을 고려하는 곳이 늘고 있다. 명동지역의 부동산 관계자는 “을지로입구에 있는 마사지숍 하나가 최근 매물로 나왔다”며 “주변의 다른 부동산 업자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마사지숍 매물이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관광 비수기에다 엔저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일본인 관광객을 많이 받는 마사지 업체가 타격을 많이 받는 것 같다”며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에 몰린 영세 마사지 업체도 수두룩하다”고 덧붙였다.

노점상인들은 아예 곡소리를 하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품 짝퉁 파우치ㆍ지갑을 파는 한 노점상은 “최근 원ㆍ엔 환율이 200원 가까이 떨어져 손님수가 줄어들었다”며 “똑같은 돈으로 예전만큼 살 수 없으니 물건을 적게 사간다”고 말했다. 일본인 고객을 상대로 한 음식점 앞에는 업주들이 직접 나와 호객행위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이동희 명동 관광특구협의회 사무국장은 “지난해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관련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일본 관광객이 많이 줄어들었다”며 “거기에다 엔저현상이 겹치면서 명동 상권이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에선 명동상인이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냐고 꼬집는다. 엔저현상 때문에 일본인 관광객이 줄어들긴 했지만 중국인 관광객은 되레 증가하지 않았느냐는 거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동희 사무국장은 “중국 관광객 대부분은 저가 단체관광객”이라며 말을 이었다. “중국인 관광객은 여행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상품 중엔 명동이 포함돼 있지 않은 게 많다. 명동에 들르려면 추가비용을 내야 하기 때문에 중국인 관광객은 명동에 잘 오지 않는다.” 일본인 관광객이 사라진 자리를 중국 관광객이 대신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늘어나는 중국인 관광객? 글쎄…

 
특히 국내 면세점과 백화점에서 물건을 찾는 소득 상위층을 제외한 중국인 관광객(패키지 상품 여행자)은 지출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이동희 사무국장은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중국인 관광객은 저가의 보세의류를 선호한다”면서도 “그렇다고 동대문 등 보세의류를 살 수 있는 곳에서 지출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동대문의 상인들은 중국인 관광객의 방문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동대문 지역의 한 쇼핑몰 관계자는 “중국인 방문객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며 “일본 고객과 달리 막무가내로 가격을 깎는 경우가 많고 구매력도 높지 않다”고 말했다. 동대문 밀리오레의 한 상인은 “중국인들은 5000원짜리 기모 레깅스도 비싸다고 말한다”며 “무턱대고 가격부터 깎기 때문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고 꼬집었다.

외국인 관광객 1000만 시대가 열렸다. 곳곳에서 ‘관광한국’의 시대가 열렸다며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러나 통계만 그럴 뿐 현장은 싸늘하게 식어 있다. 국내 관광객 30% 이상을 차지하던 일본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명동상권은 위기를 맞고 있다. 일본 아베 정권은 ‘양적완화 정책’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면 엔저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게 뻔하다. 명동상권은 갈수록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중국인 관광객이 이를 메워주는 것도 아니다. 면세점과 백화점에서 큰돈을 펑펑 쓰는 왕서방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아베발發 엔저열풍이 국내 관광업계를 얼리고 있다. 대책이 필요할 때다. 1000만 시대를 맞은 국내 관광업계가 외국인을 끌어들일 만한 ‘콘텐트’가 있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늦으면 죽는다. 명동시장엔 벌써 레퀴엠이 울려퍼지고 있다. 
김미선 기자  story@thescoop.co.kr|@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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