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⓲
전국 곳곳에 산불 번질 때
골프 연습하고 술자리 가진 도지사
논란의 불씨 제공하는 정치인들
지도자의 모습은 역사에 기록

큰 산불이 났다. 소방당국과 유관부처, 그리고 공무원이 산불의 진화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런데 정작 지자체의 장은 그 시간에 골프 연습을 하고 술자리를 가졌다. 산불은 진화됐지만 여론은 성난 마음을 감추지 않고 표출했다. 지도자의 자질은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는 법이다. 전쟁 와중에 한양을 떠난 선조와 화마가 덮친 와중에 골프를 치고 술자리를 가진 그들이 뭐가 다르던가. 

지도자의 자질은 중요한 순간에 나타난다.[사진=뉴시스]
지도자의 자질은 중요한 순간에 나타난다.[사진=뉴시스]

왕을 지켜야 할 고위 공직자들은 물론 군사들까지 모두 도망쳤다는 소식에 선조가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장계가 하나 올라왔다. 목숨을 내건 전쟁터에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살아남은 이일이 보낸 장계였다.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한 전말과 함께 적군이 곧 한양에 도착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선조는 1592년 4월 30일 이른 새벽, 군복을 입고 말에 올라타 파천을 단행했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혼琿, 제5왕자 신성군 후珝, 제6왕자 정원군 부琈(후일의 대원군)가 뒤를 따라 광화문을 나섰다. 

선조가 한양을 떠나자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유도대장 이양원이 질서를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성들은 노비문서를 보관하고 있던 장예원과 형조를 불살랐다. 이어 내탕고에 난입해 궁궐의 재물을 끌어냈고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에도 불을 질렀다. 선조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무너진 민심과 불길뿐이었다.

그로부터 400년이 훌쩍 지난 2023년 3~4월에도 한국엔 ‘불길’이 번졌다. 3월 말부터 시작된 불의 진원지는 산이었다.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전국 곳곳에서 모두 53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53건은 3일 동안 난 산불로는 가장 많은 숫자다. 이 때문인지 전국 지자체와 유관부처 관계자들은 주말을 반납하고 산불을 끄는 데 동참했다. 문제는 이번에도 ‘지도자급 정치인’이었다. 

첫번째 인물은 김진태 강원도지사다. 김 지사는 3월 마지막주 금요일에 속초에서 식목일 행사 등의 일정을 마치고 춘천으로 복귀하던 중 도청이 아닌 골프연습장을 찾았다. 당시 강원도 곳곳에선 산불이 번지고 있었다. 

두번째 인물은 김영환 충북도지사다. 그는 충북 제천 지역에 산불이 확산했던 3월 30일 저녁 술자리에 참석해 논란을 일으켰다. 김 지사는 30일 식목일 기념 나무심기 행사, 충북도립교향악단 연주회 등 일정을 소화한 뒤 오후 9시께 충주의 한 음식점에서 청년단체와 술자리를 겸한 비공식 간담회를 가졌다.

그런데 그 시간 산림당국과 지자체 관계자들은 충북 제천 봉황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재발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 산불은 축구장 면적 30배에 달하는 21ha를 태운 뒤 다음날 오전 9시 30분께 진화됐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이전에도 논란의 불씨를 제공했던 인물이다. 김진태 지사는 지난해 10월 “레고랜드의 빚보증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원에 강원중도개발공사(GJC)의 회생 신청을 하겠다”고 선언했다가 채권시장을 위험의 불덩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김영환 지사는 지난 3월 윤석열 정부가 추진했던 일제 강제 동원 피해 배상안을 두둔하면서 “친일파가 되겠다”는 막말을 입에 담아 민심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어떤 조직이든 ‘장’이 논란의 중심에 서면 실무진만 괴롭다. 강원도든 충북도든 그 이후 각종 미디어의 집중포화를 당했고, 그 총알은 실무진이 맞아야 했다. 

전쟁 중에 몽진을 결정한 못난 임금을 모셔야 하는 대신들도 속이 시끄럽긴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뜻을 모으지 못한 채 분열했다.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피신하는 도중에 대신들 사이에선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사헌 윤두수는 “북도는 군마가 정강하고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은 하늘이 부여한 땅이니 함경도로 가시지요”라고 주장했다. 이항복은 “만약 나라의 기세가 꺾이고 힘이 빠져 어찌할 도리가 없으면 명나라에 의탁해야 할 것”이라며 평안도 의주를 추천했다.

선조는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류성룡이 두 사람의 말에 모두 찬성하지 않는다며 말을 꺼냈다. “북도는 교통이 불편하니 적병이 따라오면 더 갈 곳이 없소. 성상이 한 걸음이라도 조선 땅을 떠난다면 조선은 벌써 우리 것이 아닌 것이오.” 

류성룡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어갔다. “어찌하여 성상이 조선을 떠난다는 말을 입 밖에 낸단 말이오? 만일에 이 말이 전파되면 민심이 소동할 것이니 어찌 말을 경솔하게 하오.” 이항복은 재빨리 사과하고 류성룡의 의견에 동조했다. 

피난 가던 선조 일행이 임진강을 건너가려고 하는데, 날이 어두워 앞이 안 보였다. 여기서 류성룡은 ‘일석이조’의 패를 꺼내 드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그는 나루터지기의 관사에 불을 놓게 했다. 강 너머까지 시야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뒤쫓아 오는 왜군이 강을 넘기 위해 만들 뗏목의 재료가 모두 불에 타버렸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완패한 지 이틀 만에 서울 한성을 포기하고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향하던 선조 일행은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렀다. 이때 파주목사 허진, 장단부사 구효연 등이 음식물을 가져왔다. 허기진 호위병들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는데 선조는 언덕 위에 올라 강을 내려다보며 묻는다.

“우계 성혼成渾(한학자)의 집이 어느 쪽이냐, 성혼은 어딜 갔기에 나를 맞이하지 않느냐.” 신하들이 “거리가 멀어 미처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둘러댔다. 피난 가는 신세임에도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 장수 대신 학자를 찾는다는 게 애처로울 뿐이다. 

한양을 출발한 지 사흘 만인 5월 1일, 선조 일행은 개성에 도착했다. 이어 3일 개성에서 출발, 7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도 대관 무리들은 서로 ‘남의 탓’을 내건 당파싸움을 벌였다. 

영의정 이산해가 첫 번째 타깃이 됐다. “영의정이 국정을 잘못 운영했기 때문에 왜란을 불렀고, 이로 인해 성상이 몽진의 고초를 당했다.” 서인들은 영의정 이산해를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서인 측은 이산해보다 좌의정 류성룡을 더 미워했다. 그렇지만 동인인 두 사람을 한꺼번에 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고 이산해를 먼저 공격한 것이다.

김진태 강원지사는 강원중도개발공사의 회생 신청을 하겠다고 선언했다가 채권시장을 위험에 빠뜨렸다.[사진=뉴시스]
김진태 강원지사는 강원중도개발공사의 회생 신청을 하겠다고 선언했다가 채권시장을 위험에 빠뜨렸다.[사진=뉴시스]

선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죽을 고생을 하며 따라온 늙은이를 파직한다는 것은 인정상 못할 일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러자 서인 측 유홍, 윤근수, 최흥원 등이 입을 모아 다시 이산해를 저격했다. “나라를 그르친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줏대 없는 선조는 결국 이산해를 면직하고 류성룡을 영의정으로, 최흥원을 우의정으로, 우의정이었던 이양원을 좌의정으로 정리했다. 

류성룡이 수상 자리에 오르자 서인들은 “류성룡을 탄핵해야 한다”며 또다시 목청을 높였다. “지난해에 일본으로 갔던 조선통신사 중 서인인 황윤길은 ‘풍신수길이 반드시 조선을 침범하리라’고 보고했는데, 만약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이리 되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김성일의 잘못된 판단을 이산해, 류성룡 등 동인 일파들이 편들어 나랏일을 그르쳤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동인들은 서인들의 이 같은 주장에 변명할 길이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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