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에는 서촉을 정벌하던 방통이 적장 장임의 꾀에 넘어가 계곡에서 포위돼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곡에 들어선 방통은 ‘낙봉파落鳳坡’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그 순간, ‘아뿔싸! 내가 여기서 꾐에 빠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의 호는 봉추鳳雛였고, 낙봉파의 낙자는 떨어질 낙落자였기 때문입니다. 봉추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지명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겁니다. 이순신이 서거하신 관음포가 보이는 뒷산에 그분을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의 이름은 ‘이락사李落祠’입니다. 이충무공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합쳐서 만든 이
통영시(시장 강석주)는 박경리 소설가의 작가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2019 박경리 문학축전'을 통영예총 주관으로 5월 4일~5일 양일 간 서피랑 공원과 박경리기념관(산양읍 소재) 일원에서 개최한다. 시는 지난해까지 10여 년 동안 박경리 선생 추모제를 개최해 왔으며, 박경리 선생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예향 통영의 위상에 걸맞은 행사를 열고자 추모제를 문학축전으로 승화했다. 올해 새롭게 시작하는 '2019 박경리 문학축전'의 주 행사장은 박경리 선생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자 선생이 태어나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배설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명령에 불복종해 최소한의 수군 병력을 지켜냈고, 한산도 통제영에 있던 막대한 군사물자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막아냈습니다. 전란 직후 처형됐지만 6년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돼 사면ㆍ복권됐습니다. 나름대로 억울했고 군인으로서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한산도대첩 : 세계 해전사史의 별이 되다 앞서 명량해전을 말할 때, 이순신의 전투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전투 방식은 철저한 정
이순신은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 8월 15일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됐습니다. 앞서 말했듯 통일된 지휘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로 내정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기 한달 전인 1593년 7월 15일, 이순신은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습니다. 한산도 통제영의 건축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이순신은 한산도 곳곳으로 진을 옮기며 왜군을 공격했습니다. 전라도로 가는 바닷길을 틀어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593년 3월 8일, “한산도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처음으로 「난중일기」에 등장합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할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청구영언」 영조 때 김천택이 유명한 글을 모은 문집…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여섯척과 중선 스물네척, 소선 열세척 모두 일흔세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히게 될 것 같아 싸움하기 곤란했습니다.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해지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해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한산도
최초의 착량묘는 작지만 정갈한 초가집이었습니다. 이후 고종 14년 1877년에 이순신의 10대손인 통제사 이규석이 기와집으로 고쳐 지었습니다. 이와 함께 호상제라는 건물을 지어 지방민의 자제를 교육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0여년 후인 1979년과 1980년에 건물이 추가돼 어엿한 서원 양식을 갖췄습니다. 매년 음력 11월 19일엔 이순신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냅니다.통영 = 삼도수군 통제영. 가배량주가 통영이 됐지만 정작 이순신은 근무한 적 없는 곳. 세병관洗兵館에 간다는 말은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에 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세병관
통영시는 통제영이 있던 도시입니다. 통영시의 일부는 한때 충무시忠武市였습니다. 충무시의 충무는 충무공忠武公에서 왔습니다. 충무 김밥의 유래도 충무시입니다. 통영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선조 39년 1606년,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습니다. 현종 4년 1663년에는 남해 충렬사와 함께 사액사당이 됐습니다. 사액사당이란 임금이 ‘현판(額)을 내린(賜)’ 사당이라는 뜻입니다. 그 후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통영 충렬사에는 유물 전시관이 부속돼 있습니다. 충렬사 유물 전시
익숙한 단어 몇 개를 떠올려 봅니다. 통영, 충무 그리고 충무김밥. 모두가 임진왜란이나 충무공 이순신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단어를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니, 새삼 신기합니다.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 통제영三道水軍 統制營’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원래 이름은 ‘가배량수’였는데 통제영이 세워진 후부터 통영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였습니다. 삼도三島는 충청도ㆍ경상도ㆍ전라도를 뜻하고, 삼도 수군은 충청 수영ㆍ전라 좌수영ㆍ전라 우수영ㆍ경상 좌수영ㆍ경상 우수영을 의미합니다. 전라
[뉴스페이퍼 = 정근우 기자] 아침 저녁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한 낮에 햇볕에 기분마저 좋아지는 계절 봄이 왔다.봄을 맞아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경남 통영을 추천한다. 통영은 작은 마을의 소박한 아름다움부터 봄을 온몸으로 즐기는 역동적인 재미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다.통영의 대표 명소는 서피랑마을이다. 이곳은 동피랑 마을과 함께 통영의 대표적인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그러나 동피랑 마을보다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라 오롯이 통영의 풍경을 느끼기에 제격이다. 또한 관광지로 발달된 동피랑 마을과 달리 주민들의 삶을
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4회 순신은 미리 준비하여 둔 술과 안주를 올리라 명하여 술잔을 서로 권하여 잔치로 놀게 하고 순신이 손수 술잔을 들어 제장에게 권하며 마음을 합하고 죽기로써 힘써서 사직과 창생을 붙들자고 국가에 대한 성의를 피력하였다. 처음에는 나아가 싸우기를 원치 아니하던 사람들도 죽기로써 싸우기를 자원하였다. 임진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