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②
순신은 강원도 금강산에서 노인을 만난 후 붓대를 던지고 무예를 배울 뜻을 세웠다. 그러하여 「무경칠서(중국의 일곱가지 병서)」와 「사전자집(인물의 전기)」을 더욱 연구·참고하며 활 쏘고 말 달리고 창검 쓰는 법을 열심히 연습하며 십팔기라는 기술로 몸을 단련하였다. 순신의 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상주방씨尙州方氏였다.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여식이었다. 방진은 무인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감했던 순신은 어느 날 어떤 아이에게 「통감삼권」이라는 책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한나라 여후呂后가 척부인戚夫人의 팔다리를 끊은 뒤에 뒷간에 집어넣고 부르기를 ‘인체(사람돼지)’라고 하였다. 여후의 아들 혜제惠帝가 그 어머니 여후에게 간하기를 ‘차비인소위此非人所爲’라고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 순신은 “이는 사람에게 할 바 아니다”고 가르쳤다. 이 얘기를 때마침 길을 가던 영의정 동고東皐 이준경이 들었다. 이준경 역시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고 배운 터지만 생각해보니 ‘사람에게 할 바가 아니다’가 맞았다. 만일 ‘사람이 할 바 아니다’ 하면 그 어머니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고 해석하면 불경불효不敬不孝가 되는 셈이었다.
동고 이준경은 황연히 깨닫고 크게 감동하여 교자에서 내려 사숙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14~15세가 될락말락한 순신은 침착한 행동으로 동고 현상賢相이라는 걸 확인한 연후에인사하였다.[※ 참고: 당시엔 간신 정승도 많았다.] 이준경은 순신의 풍채를 살펴본즉 범의 머리에 제비턱(虎頭燕·무인으로 귀하게 될 상)으로, 장래에 만리의 봉토를 다스릴 제후의 상이었다. 이준경은 순신의 장래를 크게 기대하여 간곡히 예우했다. 그리고 심중에 무쌍국사(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인재)가 될 줄로 알고 크게 칭찬하면서 돌아갔다.
순신의 나이 19세가 되어 학문을 많이 이뤘지만 더 연구하기 위하여 그 부모에게 허락을 얻은 후 홍연해洪漣海, 선거이宣居怡 등 동지들과 함께 강원도 금강산으로 글공부를 갔다. 그곳에서 몇달을 머물던 순신은 어느 날 마음을 풀어 후련하게 하려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천봉만학千峯萬壑의 경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발 아래 바위구멍에서 큰 곰 한 마리가 나오는 게 아닌가. 동지 홍연해, 선거이는 깜작 놀랐다.
순신은 그 대들어 덤비는 곰을 그저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창검이 없어 맨손으로 격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 곰과 격투를 벌여 살풍경이 일어났다. 그 곰은 순신의 용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지 그만 달아난다. 순신은 분을 참을 수 없어 그 곰을 쫓아 험한 언덕과 절벽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 곰의 꼬리를 붙잡으려 하였지만 제아무리 비호같은 순신이라도 살 쏘듯 도망치는 곰을 잡기는 어려웠을 터. 순신은 점차로 수십리가 되는 심산절협으로 들어갔다. 두 동지가 따르고자 하였으나 기력이 미처 그러지 못해 순신만 홀로 남았다.
어린 순신, 영의정을 감동시키다
홀연 그 곰은 간 데 없고 곰이 없어진 자리에 한 노인이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 풍채는 신선 같다. 순신은 황연히 그가 신인인줄 깨닫고 앞에 나아가 배례하였다. 그 노인은 몸을 일으켜 답례하고 이렇게 말하면서 책 한권을 건냈다. “… 아까 곰을 시켜 그대를 맞은 건 그대는 하괴성의 정기를 받은 사람이니 문文을 놓고 무武를 배웠다가 위태로운 조선의 사직을 붙들어 중흥하게 함이라….” 하괴성은 북두칠성의 두번째 별인 ‘선’을 말한다.
순신이 두 손으로 받아본즉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던 병서兵書였다. 순신이 두번 절하고 그 노인의 존호를 물었다. 노인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나는 중국 진秦나라 노생(진시황에게 불로장생을 건의한 도사)이다. 조선의 도인 영랑, 술랑(남랑, 안상과 더불어 신라 효소왕 때 화랑 출신의 사선)이라 하는 친우와 수년간 이 산중에 은거하노라”고 답하고 홀연 사라졌다. 순신은 마음이 그윽하여 꿈속인가 하다가 돌아왔다.
순신은 그 이후로는 붓대를 던지고 무예를 배울 뜻을 세웠다. 그러하여 「무경칠서(중국의 일곱가지 병서)」와 「사전자집(인물의 전기)」을 더욱 연구·참고하며 활 쏘고 말 달리고 창검 쓰는 법을 열심히 연습하며 십팔기라는 기술로 몸을 단련하였다. 순신의 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상주방씨尙州方氏였다. 전 평창군수 방홍方弘의 증손녀요, 영동현감 방중규方中規의 손녀요,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여식이었다. 방진은 무인 출신으로 힘이 보통 사람을 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방진은 누대로 아산 백암리에서 살아와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다. 방씨부인도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숙성하였다. 나이 겨우 12세 되던 때에 어느 날 밤에 화적火賊 강도떼가 팔구명이 작당하여 방진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여러 대 수령의 집이니 보물이 많으리라 하는 추측에서였다. 강도들은 모두 흉기를 들고 있었다. 자다가 놀라 일어난 방진은 활을 찾아들고 다락 위에 올라 앉아 살을 당겨 들어오는 적을 향해 쏘았다.
화적들은 본래부터 방진이 활 잘 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화살이 다하기까지는 겁이 나서 들어오지를 못하였는데 화적 몇명은 벌써 그 화살에 맞아 중상을 당하고 거꾸러진 모양이었다. 화적들도 사생간 긴장되었던 것이다.
방진의 화살이 더 이상 날아들지 않자 화적들은 화살을 모두 소신한 줄 알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실제로 그랬다. 방진은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시비를 불러 자신의 방에서 화살을 가져오라 명했지만 그중 매수된 자가 있어 화살을 채우지 못했다. 위기일발이었다.
금강산에서 만난 노인의 한마디
그때 12세짜리 소녀 방씨가 부친에게 알리길 “화살이 아직 방 안에 많이 있소” 하고 베틀에 쓰는 잡죽雜竹 한 단을 부친이 앉은 다락에 던지니 그 소리가 화살소리와 같았다. 화적들은 그 잡죽 소리를 듣고 화살이 많이 남아 있는 줄로만 알고 도망쳤다. 소녀의 계책으로 일가가 화를 면하고 무사한 셈이었다. 방씨의 나이 장성함에 용모와 덕행이며 재예와 학문을 겸비하고 출중하였다. 그 부친 방진은 무남독녀인 방씨를 슬하에 두고 그 배우자가 될 사위로 당세영웅을 택하여 자기가 죽은 뒤의 일과 집안의 제사까지 맡기려고 하였다.
방진의 친우 중 혹자는 명령자(양자)를 들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방진은 그때마다 이렇게 답했다. “옛날에는 아들과 딸이 모두 없어야 양자를 들였다. 나는 일녀를 두었으되 남의 아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방진은 사람 많은 서울로 올라가 각 서숙書塾을 방문하며 수탐하는 중에 자기와 사제지분이 두터운 동고 이준경을 찾아가 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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