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②

순신은 강원도 금강산에서 노인을 만난 후 붓대를 던지고 무예를 배울 뜻을 세웠다. 그러하여 「무경칠서(중국의 일곱가지 병서)」와 「사전자집(인물의 전기)」을 더욱 연구·참고하며 활 쏘고 말 달리고 창검 쓰는 법을 열심히 연습하며 십팔기라는 기술로 몸을 단련하였다. 순신의 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상주방씨尙州方氏였다.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여식이었다. 방진은 무인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 강원도 금강산에서 글공부를 하던 순신은 한 노인의 말을 듣고 '무인의 길'로 접어들었다.[사진=더스쿠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감했던 순신은 어느 날 어떤 아이에게 「통감삼권」이라는 책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한나라 여후呂后가 척부인戚夫人의 팔다리를 끊은 뒤에 뒷간에 집어넣고 부르기를 ‘인체(사람돼지)’라고 하였다. 여후의 아들 혜제惠帝가 그 어머니 여후에게 간하기를 ‘차비인소위此非人所爲’라고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 순신은 “이는 사람에게 할 바 아니다”고 가르쳤다. 이 얘기를 때마침 길을 가던 영의정 동고東皐 이준경이 들었다. 이준경 역시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고 배운 터지만 생각해보니 ‘사람에게 할 바가 아니다’가 맞았다. 만일 ‘사람이 할 바 아니다’ 하면 그 어머니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고 해석하면 불경불효不敬不孝가 되는 셈이었다.

동고 이준경은 황연히 깨닫고 크게 감동하여 교자에서 내려 사숙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14~15세가 될락말락한 순신은 침착한 행동으로 동고 현상賢相이라는 걸 확인한 연후에인사하였다.[※ 참고: 당시엔 간신 정승도 많았다.] 이준경은 순신의 풍채를 살펴본즉 범의 머리에 제비턱(虎頭燕·무인으로 귀하게 될 상)으로, 장래에 만리의 봉토를 다스릴 제후의 상이었다. 이준경은 순신의 장래를 크게 기대하여 간곡히 예우했다. 그리고 심중에 무쌍국사(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인재)가 될 줄로 알고 크게 칭찬하면서 돌아갔다.

순신의 나이 19세가 되어 학문을 많이 이뤘지만 더 연구하기 위하여 그 부모에게 허락을 얻은 후 홍연해洪漣海, 선거이宣居怡 등 동지들과 함께 강원도 금강산으로 글공부를 갔다. 그곳에서 몇달을 머물던 순신은 어느 날 마음을 풀어 후련하게 하려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천봉만학千峯萬壑의 경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발 아래 바위구멍에서 큰 곰 한 마리가 나오는 게 아닌가. 동지 홍연해, 선거이는 깜작 놀랐다.

순신은 그 대들어 덤비는 곰을 그저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창검이 없어 맨손으로 격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 곰과 격투를 벌여 살풍경이 일어났다. 그 곰은 순신의 용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지 그만 달아난다. 순신은 분을 참을 수 없어 그 곰을 쫓아 험한 언덕과 절벽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 곰의 꼬리를 붙잡으려 하였지만 제아무리 비호같은 순신이라도 살 쏘듯 도망치는 곰을 잡기는 어려웠을 터. 순신은 점차로 수십리가 되는 심산절협으로 들어갔다. 두 동지가 따르고자 하였으나 기력이 미처 그러지 못해 순신만 홀로 남았다.


어린 순신, 영의정을 감동시키다

홀연 그 곰은 간 데 없고 곰이 없어진 자리에 한 노인이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 풍채는 신선 같다. 순신은 황연히 그가 신인인줄 깨닫고 앞에 나아가 배례하였다. 그 노인은 몸을 일으켜 답례하고 이렇게 말하면서 책 한권을 건냈다. “… 아까 곰을 시켜 그대를 맞은 건 그대는 하괴성의 정기를 받은 사람이니 문文을 놓고 무武를 배웠다가 위태로운 조선의 사직을 붙들어 중흥하게 함이라….” 하괴성은 북두칠성의 두번째 별인 ‘선’을 말한다.

순신이 두 손으로 받아본즉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던 병서兵書였다. 순신이 두번 절하고 그 노인의 존호를 물었다. 노인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나는 중국 진秦나라 노생(진시황에게 불로장생을 건의한 도사)이다. 조선의 도인 영랑, 술랑(남랑, 안상과 더불어 신라 효소왕 때 화랑 출신의 사선)이라 하는 친우와 수년간 이 산중에 은거하노라”고 답하고 홀연 사라졌다. 순신은 마음이 그윽하여 꿈속인가 하다가 돌아왔다.

순신은 그 이후로는 붓대를 던지고 무예를 배울 뜻을 세웠다. 그러하여 「무경칠서(중국의 일곱가지 병서)」와 「사전자집(인물의 전기)」을 더욱 연구·참고하며 활 쏘고 말 달리고 창검 쓰는 법을 열심히 연습하며 십팔기라는 기술로 몸을 단련하였다. 순신의 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상주방씨尙州方氏였다. 전 평창군수 방홍方弘의 증손녀요, 영동현감 방중규方中規의 손녀요,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여식이었다. 방진은 무인 출신으로 힘이 보통 사람을 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 순신의 부인 방씨는 어린 시절 총기가 넘쳤다고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방진은 누대로 아산 백암리에서 살아와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다. 방씨부인도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숙성하였다. 나이 겨우 12세 되던 때에 어느 날 밤에 화적火賊 강도떼가 팔구명이 작당하여 방진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여러 대 수령의 집이니 보물이 많으리라 하는 추측에서였다. 강도들은 모두 흉기를 들고 있었다. 자다가 놀라 일어난 방진은 활을 찾아들고 다락 위에 올라 앉아 살을 당겨 들어오는 적을 향해 쏘았다.
화적들은 본래부터 방진이 활 잘 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화살이 다하기까지는 겁이 나서 들어오지를 못하였는데 화적 몇명은 벌써 그 화살에 맞아 중상을 당하고 거꾸러진 모양이었다. 화적들도 사생간 긴장되었던 것이다.

방진의 화살이 더 이상 날아들지 않자 화적들은 화살을 모두 소신한 줄 알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실제로 그랬다. 방진은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시비를 불러 자신의 방에서 화살을 가져오라 명했지만 그중 매수된 자가 있어 화살을 채우지 못했다. 위기일발이었다.
 

▲ [더스쿠프 그래픽]

금강산에서 만난 노인의 한마디

그때 12세짜리 소녀 방씨가 부친에게 알리길 “화살이 아직 방 안에 많이 있소” 하고 베틀에 쓰는 잡죽雜竹 한 단을 부친이 앉은 다락에 던지니 그 소리가 화살소리와 같았다. 화적들은 그 잡죽 소리를 듣고 화살이 많이 남아 있는 줄로만 알고 도망쳤다. 소녀의 계책으로 일가가 화를 면하고 무사한 셈이었다. 방씨의 나이 장성함에 용모와 덕행이며 재예와 학문을 겸비하고 출중하였다. 그 부친 방진은 무남독녀인 방씨를 슬하에 두고 그 배우자가 될 사위로 당세영웅을 택하여 자기가 죽은 뒤의 일과 집안의 제사까지 맡기려고 하였다.

방진의 친우 중 혹자는 명령자(양자)를 들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방진은 그때마다 이렇게 답했다. “옛날에는 아들과 딸이 모두 없어야 양자를 들였다. 나는 일녀를 두었으되 남의 아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방진은 사람 많은 서울로 올라가 각 서숙書塾을 방문하며 수탐하는 중에 자기와 사제지분이 두터운 동고 이준경을 찾아가 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