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⑤

 

▲ 순신과 율곡은 19촌 사이다. 하지만 순신은 율곡이 만나자는 청을 거절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1579년 2월, 순신은 훈련원 봉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때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하관직이던 순신이 이를 불허했다. 서익은 상관의 지위를 악용해 순신을 억압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다들 순신이 앞날을 돌보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세월이 흘러 서애 유성룡과 율곡 이이 두 사람이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율곡이 서애에게 물었다. “우리나라가 남왜南倭와 북호北胡 사이에 있어 때때로 변경이 시끄러우니 만일에 대란이 일어난다면 누구를 대장으로 삼아 난을 평정하겠소? 대감은 혹시나 대장감이 될 만한 사람을 보았소?” 서애는 답하되 “내가 어찌 알겠소마는 이순신과 권율權慄 같은 이가 장군감일까 하오”라고 했다. 율곡이 “권율은 권정승의 아들이오만 이순신은 그 누구요”라고 묻자 서애는 이렇게 답했다. “이순신은 대감의 족인族人이오[※참고: 이순신과 율곡은 덕수 이씨다. 따지자면 19촌 사이로, 충무공이 율곡보다 한 항렬 높은 아저씨뻘이다]. 지금은 하급관리에 머물러 알아보는 사람이 없소만 분육의 용기와 손오孫吳의 지략을 겸한 인물인 줄 아오.”

이 말은 들은 이조판서 이이는 유성룡에게 부탁해 이순신과 상면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순신은 이런 명분을 들어 사양했다고 한다. “내가 율곡과 불과 19촌의 족인일 뿐만 아니라 그대의 청하는 바이니 가보는 것도 무방하나, 율곡이 방금 이조판서의 직에 있어 관직을 임명하는 권한을 잡고 있으니, 내가 방문함이 불가할 것이네.” 이는 순신이 권문세가에 출입해 세속의 허영을 취하는 걸 치욕으로 아는 까닭이었다.

순신은 1576년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압록강 상류에 있는 이순신의 첫번째 근무지)의 권관(종9품)이 되어 부임하였다. 이때 함경감사 이후백李後白이 변방의 진鎭을 순방하여 장수들의 무예를 시험해 능력이 형편 없는 자는 형벌로 다스렸다. 평소에 무예에 태만한 장수는 그 엄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감사가 차차 순방하여 순신의 진에 이르렀다.

원래 청련靑蓮 이후백은 지인지감이 있는 재상이라 순신을 한번 보매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정성껏 우대하여 계급의 절차를 차리지 아니하였다. 순신이 조용히 이후백에게 그 형벌의 위엄이 자못 과중함을 간하였다. 후백이 미소를 보내며 “내 어찌 연고 없이 형벌을 남용하겠는가. 변장(첨사ㆍ만호ㆍ권간 등을 이름)들이 무신의 직분을 지키지 않기 때문일세”라며 순신의 간절한 정을 깊이 감사하였다.

1579년 2월에 동구비보에서 임기를 마친 순신은 훈련원 봉사(종8품 문관)로 이직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병조정랑兵曹正郞 서익徐益이 자기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옹호하여 단계를 뛰어넘어 훈련원 참군(종7품 무관)이라는 벼슬에 승진시키고자 하였다. 순신은 이를 불허했다. “관직이 낮고 승진이 곤란한 사람은 천거하고 관직이 높고 당연히 승진해야 할 자는 정체시켜 천거하지 않으면 공도公道가 어디 있다고 하겠습니까? 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만나자’는 율곡의 청 거절한 순신

서익이 상관의 지위를 악용해 순신을 억압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서익은 크게 노했지만 체면에 구애되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원래 서익이란 사람은 성격이 강하고 오만한 인물이다. 동료일지라도 모두 두려워 피한다. 그러나 순신이 하관下官으로서 도리를 지키며 굽히지 않으니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다들 순신이 앞날을 돌보지 않는다고 걱정하였다.
 

▲ 젊은 순신은 문무 양쪽에 모두 능통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 때 순신의 나이는 벌써 35세였다. 부인 방씨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회ㆍ는 13세요, 둘째 아들 예ㆍ는 9세요, 막내 면ㆍ은 3세가 되었다. 당시 병조판서 김귀영은 서울의 갑부였다. 순신은 씻은 듯 가난하였다. 김귀영은 사랑하는 소실이 낳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장성하여 출가할 나이가 되었다. 꽃 같은 얼굴, 달 같은 자태, 구름 같은 머리카락, 눈 같은 피부가 실로 절대미인이요, 성품이 시원하여 장부의 기개마저 있었다. 김귀영이 극히 사랑하여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세 영웅의 배우자가 될 자격이요 범부의 짝은 아니다.”

김귀영의 문객 중 한 사람이 이순신을 추천하면서 “순신이 비록 하급 관료에 있으나 그 인격, 풍채, 무예, 용력이며 문필과 병법이 독보적입니다. 또한 인품이 부드럽고 침착하여 그 흉중에는 풍운변화가 있는 듯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대감의 바라는 바 사윗감이 됨직합니다”고 말한다.

김귀영이 그럴듯하게 여겨 중매자를 보내어 순신에게 권하였다. “병판 김공이 그 사랑하는 측실의 딸을 그대에게 소실로 주어 결혼하고자 함은 그대의 영풍을 흠모함이니 모름지기 취하여 소실을 삼으시게나.” 순신이 탄식하며 “권고는 감사하오만 내가 벼슬길에 처음 나서서 공업을 세우지 못하고 어찌 먼저 권문세가와의 인연에 의탁하여 부귀만 바라겠소”라며 거절하여 버렸다.

그해 10월 충청병사(병마절도사의 약칭ㆍ무관 외관직 종2품)의 군관이 되어 서익을 보기에 징그러워서 훈련원을 그만두고 충청병영(충남 해미)에 부임하였다. 기거하는 관사 안에는 이부자리 한벌이 있을 뿐이요 그밖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청렴함이 이러하다. 순신이 부모를 뵙기 위하여 본가로 상경할 적에 관사에 남은 양곡을 봉하여 관창에 환송하고 출발하였다. 병사가 그 일을 알고 경대하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 순신이 병사와 술을 마시던 중 병사가 크게 취해 순신의 손을 잡고 어느 군관의 처소에 동행하려 하였다. 그자는 병사의 평소 친우로서 군관이 된 사람이다.

순신이 생각하되 대장이 부하 군관을 밤중에 방문하는 건 공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순신은 취한 척을 하면서 병사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일방의 대장이신 사또는 밤중에 어디를 행차하려 하십니까?” 병사가 황연히 깨닫고 도로 좌석에 앉으며 “내가 술이 취하였다”고 핑계를 댔다. 그 뒤로는 순신을 더욱 경대하였다고 한다.
 

▲ [더스쿠프 그래픽]

사사로움에 취하지 않는 순신
 
순신은 1580년 7월 전라도 발포진(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수군만호(종4품 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는 순신이 해상 함대의 장수로 처음 출발하는 일이었다. 부임한 후로 군기軍器를 수선하고 병선을 개조하여 운용에 편리하기를 도모하여 제반 설비가 정밀하게 되었다.

전라감사(관찰사) 손식孫軾이 자기와 교분이 두터운 서익의 무고誣告를 믿고 순신을 미워하여 능성군(전남 화순군)에 이르러 순신을 불러 “팔진도八陣圖를 강의하고 또 육화진도六花陣圖를 그려서 바치라” 하였다.
그러자 순신이 제갈량의 팔진을 강의하여 정밀하게 통하고 붓을 잡아 이정李靖의 육화진도六花陣圖를 그려내니 필법이 정묘하고 사려가 신속하여 보는 관리들이 다 놀랐다. 트집을 잡아 파직하려 하던 손식이 크게 놀라 낯빛을 바꾸어 경대했다. 아울러 옛일들을 담론하며 일찍 만나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천하기재로 인정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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