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③

순신의 나이 20여세에 이르러서는 필법이 정묘하여 명필의 수완이 있었다. 그러나 무예를 열심히 연습하기 때문에 붓대를 집어던지고 준마를 달리고 강궁을 당기며 조선 팔도를 두루 역람했다.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바다의 깊고 얕음, 섬들의 크고 작음을 정찰하며 백성의 풍속을 통찰하기 위해서였다.

 

▲ 이순신은 전국 팔도에 기상이 알려졌음에도 교우맺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서애 유성룡이 거의 유일한 교우였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준경은 방진이 사위를 구하는 사정을 듣고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풍채가 비범하여 장래에 이름이 천하에 떨칠 제후의 상이라며 정성과 효도가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방진에게 권하였다. 방진은 본래부터 이준경이 사람을 보는 눈이 있음을 심복하던 터였다. 그래서 방진은 순신을 찾아 만나게 되었다. 순신의 나이 21세가 되던 해였다. 순신은 신장이 팔척이요 범의 머리와 제비의 턱이며 잔나비 팔과 곰의 허리였다. 힘쓰기는 분육(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맹분과 위나라의 하육을 함께 부르는 말)의 짝이며 활쏘기는 양숙(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명궁 양유기)과 맞먹었다.

방진이 크게 기뻐하여 순신의 부친과 약혼하고 을축1565년 8월에 성혼하였다. 이로부터 방지의 사위가 된 순신은 처가인 아산 백암리에서 은행나무 단을 놓고 궁술의 묘기를 장인으로부터 전수받았다. 이순신의 나이 20여세에 이르러서는 경전의 깊은 뜻을 정통할 뿐만 아니라 필법이 정묘하여 명필의 수완이 있었다. 그러나 무예를 열심히 연습하기 때문에 붓대를 집어던지고 준마를 달리고 강궁을 당기며 조선 팔도를 두루 역람해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바다의 깊고 얕음, 섬들의 크고 작음을 정찰하며 백성의 풍속을 통찰하였다.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 순신의 나이 27~28세에 이르렀다. 당시 순신과 비견할 만한 장안호걸이며 팔도장사가 없었다. 그럼에도 순신은 벼슬길로 들어서기를 서두르지 않았다. 순신은 성품과 언행이 높고 반듯해 주위 사람들이 우러러 봤다. 시속 사람들이 친구 간에 하는 네니 내니 이자식 저자식이니 하고 만만하게 구는 사람조차 없었다. 임신1572년 8월에 훈련원(조선시대 무과선발시험과 군사훈련을 맡은 관청)에서 무과의 별과 시험이 있어 순신이 비로소 과거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시험 중에 말을 타고 풍우와 같이 달려 나갈 때에 탔던 말이 실족하여 거꾸러지면서 순신이 따라 낙마하여 왼발이 부러져 유혈이 낭자하였다. 보는 사람들이 다 순신이 필시 죽었다 하여 놀라고 애석히 여겼다. 그러나 순신은 홀연히 한발로 일어서서 조금도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길가에 선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겨 가지고 상처를 동여매고 천연히 행보하여 다시 말을 잡아탔다. 훗날 마침내 그 상처가 완치되어 기세가 더욱 분발하여 전일보다 배가하였다.

이순신의 나이 32세가 되던 해 병자 1576년 1월에 식년(과거 보는 시기를 정한 해로, 만 3년에 한번씩 돌아옴) 무과시험을 보았다. 모든 무예에 다 합격이 되고 무경을 강의하여 통과하고 「황석공소서」(BC 218년 장량이 시황제를 습격했다가 실패하고 하비에 은신하고 있을 때 황석공이라는 신비한 노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책) 강의하는 중에 시험관이 묻기를 “책에 ‘한나라 장량이 적송자(신농씨 때의 비를 다스리는 신선)를 쫓아 놀았다’ 하였으니 그러면 장량이 과연 죽지 아니하고 신선이 되었단 말인가”고 물었다.

 

장인에게 궁술 묘기 전수받아

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음은 천리의 근본입니다. 주자朱子의 「강목」(자치통감 294권을 주자가 소제목을 달아 59권으로 정리한 책)에 ‘임자 6년에 장량이 세상을 떴다’ 했으니 어찌 신선이 되어 죽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신선에 가탁한 일일 것입니다.” 시험관들은 서로 돌아보고 놀라며 “이 사람이 무예에만 정통할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에 많은 포부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때에 순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화로운 창방(과거시험을 치른 후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으로 합격자는 거리를 행진한다)을 행하니 그 잔나비 팔 곰의 허리에 팔척장신인데, 용의 수염 범의 눈썹, 표범의 머리 제비의 턱, 푸짐한 코 봉황의 눈이라, 풍채는 준수하고 자태는 당당하였다. 서울 큰길에 보는 사람이 누구 아니 칭찬하리오. 양친께 배알한 뒤에 선산에 소분(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조상의 분묘에 가서 무덤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리는 것) 참배하기 위하여 향제로 내려갔다.

그때 선산 정정공 묘소에 서있던 석인 하나가 세월이 오래돼서인지 땅에 쓰러져 누웠다. 순신이 수행하여 온 하인 10여명에게 명하여 그 석인을 일으켜 세우라 하였으나 무게가 수천근 이상의 거석이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보는 사람들은 다 입을 벌려 놀라며 천신이 하강하였다 하여 감히 순신을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이로부터 순신이 장사라는 영명이 조선 팔도에 전파하였다.

순신은 명리에 담담하여 출입을 번거롭게 아니하므로 칭허(칭찬하고 교우 맺기를 허락함)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순신은 교우맺기를 즐기지 않았다. 영남 야승(민간에서 지어 엮은 역사로 야사와 같은 말)의 일화에 순신과 서애 유성룡, 백암 이충무는 한강진漢江津 배 안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아래에 그 서로 만나 친하게 된 경로를 자세히 적어본다. 서애 유성룡은 영남 안동安東 하회동河回洞 사람이다.

나이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옥당 호당(홍문당과 홍문당의 부제학·교리·부교리·수찬·부수찬을 함께 이르는 말)에 있을 때 향제에 내려가 부모를 뵙고 서울로 돌아올 때에 한강진 나루에 이르니 일색이 이미 석양이다. 나귀 한필과 시중드는 아이 하나로 나룻배에 올랐다. 사공이 배를 밀어 강 중간으로 나왔는데 어떤 한 사람이 나루터에 이르러 고함을 질러 배를 도로 돌려대라고 사공을 부른다. 그 소리가 웅장하여 근방 산악이 울렸다.
 

▲ [더스쿠프 그래픽]

배에 가득한 행객들이 사공을 꾸짖어 반대하되 일개 뒤늦은 행인을 말미암아 선중에 있는 허다한 사람의 일정이 늦어져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사공은 공손히 대답했다. “저 사람은 용력이 천근을 능히 들고 맹호를 능히 때려죽이는 천하장사일 뿐만 아니라 당금 서울 북촌에서 부원군(임금의 장인)대감이요 영의정인 모 재상가의 제일 친근한 겸종(임금의 양반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인데 성명은 몰라도 별호는 야우野牛 또는 야호野虎라 하는 사람이오. 저 자가 희다 하면 그 댁 대감도 희다 하고 저 자가 검다 하면 대감도 검다 하오. 소인의 이웃 배 동무 사공도 저 자로 해서 불쌍하게 죽고 말았소.”

 

야사에 기록된 서애와 순신의 첫 만남

그 자가 배에 오른다. 서애 역시 불쾌한 눈으로 그 자를 노려보았다. 그 자는 신체가 거대하고 얼굴에 술기운이 돋았다. 거만한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때마침 강바람이 나부껴 뱃바닥에 있는 신부의 교자의 주렴이 들렸다. 그 야우라는 자가 그 교자 안에 앉은 신부를 들여다보고 또 그 신부에게 손을 대었다. 정말 무법천지가 되었다. 신부를 호송하는 노인이 있어 그 자의 만행을 꾸짖었다. 야우가 그 꾸짖는 말에 노하여 위아래의 예절도 없이 그 노인에게 대들어 뺨을 쳤다. 그 노인은 뱃바닥에 자빠졌다.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선중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광경을 당하고 뉘 아니 분하리오. 유성룡도 청년의 기상에 노기를 감출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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