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을 벤치마킹하라

▲ 현대 정치는 정적이 되면 신회는 커녕 온갖 근거없는 뒷담화 생산에 더 열을 올린다.[사진=뉴시스]

“우리 민족은 파벌에 익숙하다. 붕당이 대표적 예다.” 그럴싸한 말로 들리지만 사실이 아니다.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거짓이다. 붕당의 콘셉트는 지금의 파벌과 완전히 다르다. 이념ㆍ혈연ㆍ학연ㆍ지연 등에 얽혀 있었지만 상대를 인정할 줄 알았고, 허무맹랑한 인신공격을 하지도 않았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일이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건강관리 차원에서 향부자(사초과 식물)를 아이 오줌과 함께 자주 먹었다. 그러다 한번은 급체해 생명이 위독해졌다. 우암은 아들을 시켜 의술이 뛰어난 미수 허목에게 처방을 받아오라 했다. 미수는 남인의 영수로 우암에겐 최대의 정적政敵이었다. 아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우암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미수는 우암의 아들에게 ‘비상(극약) 석돈’이라는 처방전을 적어줬다. 우암의 아들은 괘씸하다고 생각했지만 우암은 처방대로 약을 가져오라 했고, 그 약으로 병이 나았다. 미수는 우암이 평소 오줌을 마신다는 걸 알고, 식도에 소금기가 있으니 극약을 써도 괜찮을 거라 판단했던 거였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다. 흔히 조선시대의 당쟁을 요즘의 ‘패거리’ 혹은 ‘파벌’과 동일시하는 이들이 많지만, 일화에서 보듯 엄연히 달랐다. 이념이 다른 정적이라도 상대가 군자로 칭송받는다면 신뢰하고 예를 다했다.

▲ [더스쿠프 그래픽]
김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은 “조선시대의 당쟁을 제대로 알려면 당쟁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당쟁은 ‘원래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던 기질’이 아니다. 붕당은 ‘스승이나 이념이 같은 동창생끼리 무리지은 파벌’이다. 당연히 혈연ㆍ학연ㆍ지연 등으로 얽혀 있다. 때문에 붕당은 왕권에 도전하는 역적으로 몰려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 인재를 골라 쓰면 붕당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논리가 나오면서 ‘사림정치(붕당정치)’가 들어섰다. 그 정치시스템이 조선후기 200여년을 이끌었다.

당쟁은 무조건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며 뒤통수를 치는 진흙탕 싸움이 아니었다. 역적의 패거리로 여겨졌던 붕당이 왕과 백성에게 인정받기 위해선 철저한 논리를 필요로 했다. 여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김성무 원장은 “주자학을 기본으로 했던 조선시대의 당쟁은 논리정연한 토론의 장이었다”며 “입을 틀어막고 모든 걸 무력으로 해결하는 외국과 다른 점”이라고 지적했다.

논리에 어긋남이 없으려면 수신修身은 필수였다. 그래야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옛 성인들의 명문을 오늘의 정치에 빗대 문장을 써 내는 것이 곧 과거시험이었다”며 “말하자면 과거시험은 일종의 도덕시험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우암과 미수처럼 정적이라도 상대방을 군자로 대할 수 있는 것도,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했던 게 들통 나면 부끄러워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순기능이 많았던 당쟁이 ‘나라 망치는 주범’으로 바뀐 이유는 뭘까. 붕당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조선시대 붕당시스템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는 상대방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그래야 대립을 해도 토론으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한쪽이 너무 세면 균형이 깨진다. 상대도 인정하지 않는다. 서인들이 집권할 당시 일부러 남인을 둔 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면에서 현대 정당이 조선의 붕당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과반수 이상의 집권당이 되면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니 균형과 견제가 없고, 정치인 수신이 없으니 설득력 있는 논리도 없다. 붕당을 파벌이나 패거리와 섞어 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 | 도움말 : 김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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