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78

▲ [사진=더스쿠프 포토]
왜란을 맞아 위급존망한 시기에 이순신은 한산도에 본영을 두고 경상·전라·충청 삼도 연해의 각 읍, 각 관포, 각 도서, 각 진보에 전쟁으로 떠도는 백성을 모아 농사를 짓게 했다. 선조 이하의 조정대관들이 공담공론으로 쓸데없는 당파싸움을 하면서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

1593년 10월 4일 선조는 한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일본군은 경상도 부산 근해 연안에 16개 주둔지를 마련해 놓고 명나라와 외교적 문제를 절충하고 있었다. 선조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이 모여들었지만 먹을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은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近日飢民 無術可濟 予仰天憫歎 欲先死而不得(요즈음 굶어죽는 백성을 구제할 방법이 없으니 내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먼저 죽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구나!)”

선조는 음식을 줄이고 그것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보태라고 분부하였다. 이 무렵, 이순신은 그동안 저축하여 놓았던 쌀·소금·해물을 한성으로 실어 올려 선조를 비롯한 서울에 거하는 관민을 살렸다. 순신이 양곡을 보낼 때에 함께 올린 장계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신하된 정에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별도로 보관하였던 군량을 배에 실어 기타 잡물과 생선, 소금 약간과 같이 올려 보냅니다.”

왜란을 맞아 위급존망한 시기에 이순신은 한산도에 본영을 두고 경상·전라·충청 삼도 연해의 각 읍, 각 관포, 각 도서, 각 진보에 전쟁으로 떠도는 백성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고 소금을 굽게 하고 어로를 시켜 미곡 수십만석과 소금 수만석을 쌓았다. 때론 가축을 기르게 하며 혹은 참나무와 대나무를 배양하여 창과 활을 만들게 하고 또는 항왜들까지 이용하여 조총 등 일본식 무기를 만들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병선을 새로 짓고 하여서 혼자서 삼천리강산을 등에 짊어진 듯한 힘을 썼다. 선조 이하의 조정대관들이 공담공론으로 쓸데없는 당파싸움을 하면서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통제사 이순신이 한양 서강西江으로 실어 보낸 쌀 덕분이었다. 하여 조정은 1593년 8월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케 했다.

명나라 사신마저 존경 표해

王若曰 司命三軍 史稱推轂之重 所貴要領 易著輿尸之凶 惟卿 一生苦節 萬里長城 糾合殘兵 在慶尙全羅之要害 邀擊强寇 奏閑山唐項之奇功 勤勞表著於諸營 褒秩屢煥於三捷 顧兵家之所深缺 曰統禦之無其人 豈云如臂之使指 未免後至而先逃 適際蒼黃 未有處置 矧今賊勢之未艾 其奈詐謊之益深 斂鋒鋩於釜山 陽示捲回之意 運糧餉於滄海 陰有再擧之謀 策應之難 有甚於疇曩 玆用卿以本職 仍兼全羅忠淸慶尙三道水軍統制使 嗚呼 威克愛允濟 功惟志可崇 閫帥以下不用命者 卿可以軍法施行 行伍之中有頑鈍者 卿可以忠孝策勵 海外有截 四方以無侮 惟卿之能 榻側容鼾 三邊未息肩 惟卿之恥 卿勖哉 凶奴未滅何以家 寸土不復非爲國 予豈自安於小成 卿幸銳意於大伐 願徇初服之良圖 勉卒中興之盛業 故玆敎示 想宜知悉

▲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은 이순신은 본영을 한산도로 옮겼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왕이 이와 같이 말한다. … 오직 경은 일생의 굳은 절개요 만리의 장성이로다. 남은 병사를 규합하여 전라·경상의 요처를 차지하고, 강적을 공격하여 한산 당항의 공을 보고하였다. 힘써 일한 것은 진영 중에서 뛰어나고, 표창과 녹봉은 3번 승리에 거듭 빛났다. 돌아보건대 병가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통솔할 사람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다급한 때를 만나면 처치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적의 세력이 아직 뿌리 뽑히지 않았고 속이고 거짓말함이 갈수록 더하니 어찌하리오. 부산에서 창칼을 거두어 겉으로는 군사를 물릴 듯한 뜻을 보이면서, 대책을 세우기가 전보다 어려울 것이다.

이에 경을 본직에 더하여 충청·전라·경상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노라. 아! 위엄은 사랑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진실로 이뤄지고, 공로는 뜻을 세움으로써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바다 밖의 적들을 끊어 사방에서 우리를 업신여기는 자가 없게 함은 그대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 … 경은 적들을 크게 무찌르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으며, ‘한 치의 땅이라도 수복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될 수 없다’ 하였으니 내 어찌 작은 성공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교서를 내리는 바이니 헤아려 잘 알도록 하라.”

순신은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기로 조정에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좌수영은 적을 방어하기에는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쳐 불편하고 한산도는 일본군과 싸우는 데 있어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명나라 동정東征 총대장인 경략사 병부시랑兵部侍郞 송응창이 조선의 수군대장 이순신은 백전 연승하는 명장이란 소문을 듣고 그 허실과 방략을 알아보기 위해 수하 비서관 양보楊甫와 역관 표헌表憲을 한산도로 파견했다.

전쟁하기 싫어하는 日 제장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은 심유경의 진언을 믿고 일본과 외교적 화의를 개시하기로 했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의 풍신수길은 노쇠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대명의 사정에도 어두웠다. 조선과 명나라를 때려 부수겠다는 야심은 있었지만 그 부하 제장들은 대부분 전쟁을 더 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가등청정의 일파만 풍신수길의 뜻을 받들어 실행코자 하였지만 그 세력이 소서행장에 미치지 못했다.

당시 이순신은 조선국의 일개 수군제독에 불과한 직위였고, 아직 대신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명나라의 도독 진린은 이순신을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인물이라 하여 제갈무후에 비하였다. 양보라는 사람도 이순신을 존경하여 대좌하기를 사양하고 종일 시립하였으니 이는 공의 인격을 오자서와 관운장과 같이 보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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