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원망하며 떠나는가

▲ 낙조는 일출보다 아름답지만 황혼은 그렇지 않다. 나이가 다는 것에도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사진=아이클릭아트]
반기문(73) 전 UN 사무총장의 갑작스러운 대통령 불출마 선언보다 더 큰 충격은 정작 그의 퇴임사였다. 그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과 포부를 몰라준’ 정치권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에 대해 절절하게 분노했다.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와 가짜뉴스가 판치는 우리 정치권이 문제의 발단이기는 하지만 UN 사무총장까지 하신 분이 떠나는 마당에 저 정도 얘기밖에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한국정치 수준을 아직 몰랐단 말인가. UN 사무총장 10년을 거친 국제적인 인물의 등장을 기대했던 국민들로서는 큰 실망이었고, 본인도 스타일을 구겼다.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를 따라왔던 캠프 측근을 따뜻하게 위로하기는커녕 자신에 대한 정치권의 푸대접에 화를 내며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는 대통령 출마를 제2의 인생을 축복해주는 또 다른 꽃마차라고 착각했을지 모른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은 IMF 외환위기 때 한국경제를 살린 거인이었다. 지난해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가뜩이나 투병으로 허약해진 몸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김종인 더민주 대표와 경제민주화, 양적완화 등의 논쟁을 하면서 막말 직전까지 갔다. 4?13 총선판에 뜨거운 경제논쟁이 일어난 점은 신선한 측면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이 분야에 정통한 전문 학자들이 걸러야지 70대 노정객들의 오기싸움으로 번진 것은 유감이었다. 강 전 장관은 투병 중에도 입원했던 병원의 치료시스템까지 예리하게 지적했다고 한다. 반 전 총장이나 강 전 장관은 이 땅이 배출한 인재 중 인재다. 그러나 그들은 화를 내는 뒷모습을 잔영처럼 남겼다.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화려한 경력의 70대 인사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물론 그들이 경륜을 펼칠 기회를 갖는다면 한국에도 커다란 축복이다. 하지만 고작 지지율 1~2%인데도 여전히 대권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다.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도전을 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아마 그들의 내면을 한꺼풀 벗겨보면 세상에 혼자 남는 것 같은 적막감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때 화려했던 영광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스러져가는 것이 당연하건만 가슴 속 탐욕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무모한’ 도전장을 던지는지도 모른다.

잘나가던 공직자나 대기업 임원출신들이 퇴직 후 더 힘들어 한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의 모든 문제는 자신이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생긴다”고 했다. 인생 2모작, 3모작을 충분히 즐기되 노년의 삶은 이제껏 누렸던 삶과는 달라야 한다. 100세 시대를 맞는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가 은퇴하고 이렇게 오래 생존한 적은 없다는 사실, 그리하여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한 긴 외로움에 직면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혼자 사는 힘을 의미하는 고독력孤獨力이야말로 이 시대의 모든 성인이 갖춰야 할 필수덕목이다. 우선 마음 비우고 낮은 곳에서 새출발하겠다는 자세부터 갖춰야 한다. 만약 자연인 반 전 총장이 공직 경력을 살려 소외된 사람이나 젊은이들에게 꿈을 불어넣어주는 봉사활동에 나선다면 두고두고 국제적으로 존경받을 것이다.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행복의 7개 조건은 성숙한 방어기제(스트레스를 극복하는 힘),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적당한 음주, 규칙적인 운동, 알맞은 체중 7가지를 들었다. 저자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47세까지의 인간관계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혼자 살아가는 힘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고, 홀로 지구를 떠나야 한다. 어떻게 하면 고독력을 통해 홀로 남은 시간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시인 황동규는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라는 뜻으로 ‘홀로움’이라는 말을 새롭게 만들었다. 외로움(loneliness)이 고립과 단절을 의미한다면, 고독(solitude)는 독립과 재생의 의미에 가깝다. 외로움을 길들여 잃어버린 고독을 찾을 때 삶은 풍요로워지고 혼자 남았다는 적막감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끝나갈 때가 아름답다. 낙조는 일출보다 아름답고, 붉게 물든 가을단풍은 봄의 신록보다 환상적이다. 하지만 황혼의 삶은 그렇지 않다. 자칫 가시밭길이 되기 십상이다. 나이가 드는 것에도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화火는 탐욕에서 나온다. 먼저 화를 내면 지는 거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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