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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윤선 전 장관은 "블랙리스트 의혹은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국민 앞에 고개 숙여야 할 일은 적지 않다.[사진=뉴시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출신 포병대위 드레퓌스가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군부는 진범이 따로 있는 것을 밝혀내고도 사건을 철저히 은폐했다. 이때 프랑스 소설가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격정적인 글을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프랑스 사회는 들끓었다.

정의ㆍ진실ㆍ인권을 부르짖는 ‘드레퓌스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질서를 내세우는 ‘반드레퓌스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했다. 사건의 진실보다 오직 내 편과 네 편만이 존재했다. 에밀 졸라는 범죄자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받고 영국으로 쫓겨났다. 사건이 일어난 지 12년 만에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고 프랑스 공화정의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내가 바로 드레퓌스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 예술인들의 지원배제 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면서 측근에게 한 말이다. 정무수석 시절(2014년 6월~2015년 5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하고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취임(2016년 9월) 이후 문체부 내 블랙리스트 존재를 알고도 없는 것처럼 거짓말했고, 증거를 파기하거나 훼손하도록 지시했다는 의혹도 있다.

조윤선은 이에 대해 블랙리스트 사건의 핵심은 정무수석 시절 작성에 개입했느냐 여부인데 특검이 정무수석 시절 개입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한 적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이미 구속된 신동철(당시 정무비서관), 정관주(당시 국민소통비서관)가 직속 상사인 조윤선 수석에게 보고 또는 협의했다고 진술해야 당연할 텐데 그런 발표조차 없다는 것이다. 결국 정무수석 개입에 대해선 명확한 근거가 나오지 않자 지난해 9월 장관 취임 후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를 놓고 모호하게 답변한 것을 트집 잡아 위증죄로 몰고 있다는 항변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데렐라로 불리는 조윤선은 김앤장 변호사를 거쳐 비례대표로 18대 총선(2008년)에 여의도로 입성한 데 이어 여성가족부 장관, 청와대 정무수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했다. 오페라 보기를 좋아해서 한때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중심이 된 오페라 동호회 ‘라 돌체비타’를 만들어 회장을 맡았다.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예술을 사랑했던 지식인이 권력의 주구가 되어 예술을 탄압했다는 죄명으로 몰락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특검은 조윤선이 어버이연합의 관제 데모를 지원했고, 세월호를 다룬 영화 ‘다이빙벨’ 상영금지에 관련됐다고 일부 언론에 흘린다. 조윤선은 이 또한 억울하다며 펄쩍 뛰지만 촛불집회를 할 정도로 분노한 국민이 보기에는 반성할 줄 모르는 대통령 측근으로 보일 뿐이다. 조윤선이 블랙리스트 작성에 직접 관여했는지 그 실체적 진실은 본인과 극소수 외에는 알 수 없는 부분이므로 함부로 결론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특검수사나 야당의 공세는 실체적 진실규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민재판식으로 몰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구속영장에서도 조윤선이 블랙리스트 작성과정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특검이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녹취파일, 서류, 진술 등을 모조리 공개해온데 비춰보면 대단히 이중적인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검은 아마도 대통령의 측근이자 현직 장관이고, 미모ㆍ학력ㆍ재산 등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를 철저히 무너뜨림으로써 공적을 과시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의 주장대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이 땅의 문화예술을 탄압한 ‘마녀’인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매도당하는 ‘드레퓌스’인지 엄정한 법의 잣대로 심판을 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가 피해가지 못할 법이 하나 있다. 정무수석과 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도대체 뭘 했느냐는 역사와 국민의 심판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슬람 7개국 출신의 입국을 막는)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샐리 예이츠 미국 법무장관 대행을 즉각 해임했다.

하지만 시애틀 연방지법은 예이츠의 손을 들어줬다. 자신의 소신을 위해 용기있게 항명하는 예이츠를 보며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이 벌어지는 동안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한 이 땅의 고위공직자들이 떠오른다. 조윤선은 블랙리스트에 관한 한 억울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측근이면서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몰랐었다”고만 발뺌하는 것은 역사와 국민 앞에 유죄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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