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한국 세탁기 수입이 급증해 미국 기업이 피해를 입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단이다. 이 판정은 무역제재인 세이프가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연간 1조원이 넘는 삼성과 LG 세탁기의 미국 판매가 타격을 입게 된다. 지금은 절망할 상황일까. 돌파구는 또 없을까. 전문가들은 “세탁기의 전원이 아직 꺼진 건 아니다”고 말했다. 희망이 있다는 얘기다.

▲ “한국 세탁기 수입이 급증해 미국 기업이 피해를 입었다”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정이 나왔다.[사진=뉴시스]

국내 가전업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지난 5일 미국 ITC가 “수입 세탁기들이 우리 산업에 심각한 피해를 미치고 있다”고 판정하면서다. ITC 위원 4명이 만장일치로 이 주장을 인용했는데, 이는 ‘긴급 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세이프가드 조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해당 품목에 대한 수입관세 부과ㆍ인상, 수입수량(쿼터) 제한 등이다.

정부와 업계는 11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두말할 나위 없는 글로벌 최대 가전시장이기 때문이다. 이중 미국 세탁기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31%(올해 상반기 기준). 두 회사가 지난해 미국 시장에 수출한 세탁기 규모는 10억 달러(약 1조1400억원)에 이른다.

 

이런 어마어마한 시장에 무역 제재 바람이 몰려오면 두 기업의 대미對美 수출이 타격을 받을 공산이 크다. 시장은 벌써 시그널을 울렸다. 전체 매출에서 가전사업의 비중이 큰 LG전자의 주가는 출렁였다. 10일 증시에서 LG전자는 직전 거래일보다 1.94%(1600원) 내린 8만8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장 중 4% 넘게 주가가 하락하며 7만원대에 거래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업계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 세탁기에 4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비관론까지 떠돌았다. 생활가전제품의 가격 대비 이익률이 한자릿수인 걸 감안하면 이 정도 비율의 관세는 ‘시장 철수 명령’이나 다름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세이프가드 리스크’가 과장된 게 아니냐는 주장도 많다. 권성률 동부증권 애널리스트의 분석을 들어보자. “물류비 등 비용이 늘어날 순 있지만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거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계산해도 영향은 연간 영업이익의 2~3%에 불과하다.” 근거는 ‘세이프가드 발동’까지의 변수가 많다는 점이다.

■시간적 여유 충분 = 일단 대응할 시간이 있다. 산업피해 판정이 곧바로 세이프가드 발동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세이프가드 발동 과정은 꽤 복잡하다. 미국 ITC의 판정은 올해 5월 미국 최대 가전업체 월풀의 청원으로 시작됐다. 월풀은 한국산 세탁기의 공세로 미국의 관련 산업이 파국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5일 결정된 판정은 ITC가 월풀의 주장을 받아들인 거다.

LG 주가 추락한 이유

이제 미국 ITC는 19일 ‘구제조치’ 공청회를 열어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한다. 이어 11월 투표를 거쳐 세이프가드의 방법과 수준을 결정한다. 여기서 결정된 내용이 1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2월까지 세이프가드 실행 여부를 두고 최종결정을 내려야 한다. 최대 4개월의 시간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 정부와 업계엔 “월풀이 입었다는 피해가 근거 없으며, 제재가 결국 미국 소비자의 피해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거다. 특히 월풀 주장은 근거가 미약하다. 트랙라인에 따르면 월풀의 미국내 세탁기 시장점유율은 2014년 41%에서 올해 상반기 384%로 소폭 감소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1위를 지키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 기간 10%에서 17%로, LG전자는 13%에서 14%로 소폭 증가하는데 그쳤다. 자국 산업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며 내리는 규제로 보기에는 합리적이지 않다.

■발동 수준 셀까 = 세이프가드 발동 수준이 생각보다 높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IT 업계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미국은 소비자 중심의 국가다. 갑자기 미국 가전매장에서 한국 세탁기가 사라질 경우 전체 세탁기 가격 급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미국 소비자가 피해를 입는 상황이다. 세이프가드 발동에 신중하게 접근할 공산이 크다.”

세이프가드 발동의 중요 판단 근거가 ‘일자리’라는 점도 이런 주장에 힘을 싣는다. 제프 페티그 월풀 회장은 세이프가드가 필요한 이유로 “이대로 가면 많은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현재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 현지에 가전 공장을 건설 중이다. 외국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해 일자리 창출에 나서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에 매력적인 포인트다. 이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핵심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세이프가드 발동 쉬운가= 세이프가드가 발동된 역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한국산 등 수입 철강제품에 8~30%의 관세를 부과하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게 가장 최근 사례다. 이마저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를 당해 협정 위배 판정을 받았다.

■출구전략 없나 = 세이프가드가 높은 수준에서 발동해도 출구전략은 있다. 세이프가드 적용 대상은 태국과 베트남 등 해외 공장에서 생산한 세탁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한국에서 만든 물량은 포함되지 않는다. LG전자는 창원 공장 물량 20%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이 수출 비중을 최대로 늘리면 된다. 삼성전자 역시 국내 공장에서 생산한 세탁기를 미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으로 탈출구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최종 결정권자가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점은 변수다. 하지만 세이프가드가 발동되더라도 ‘시장 철수’를 운운할 상황은 아니다. 높은 수출벽도 잘만 두드리면 깨진다. 지금 필요한 건 절망이 아니라 합리적인 대응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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