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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신용회복 단계 건너뛰고
신규 대출 발생하는 신용사면 선택
법률 아닌 합의로 진행한 것도 문제
미국서도 법 개정해 서브프라임 대출
미 서브프라임 연체율, 적격대출 7배

정부가 신용사면에 나섰다. 가계대출이 사상 처음으로 1100조원이 넘어선 가운데 정부가 기존 신용회복 제도를 건너뛰고, 신규 대출이 가능한 신용사면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한편에서 ‘한국형 서브프라임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은 또 뭘까.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 1월 11일 신용사면 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 1월 11일 신용사면 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부의 신용사면은 ‘고금리·고물가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 서민·소상공인을 위해서’라는 게 명분이다. 그런데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을까.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해서 단계적으로 빚을 덜어주고, 최대한 신속하게 신용평점을 올려줄 수도 있다. 취약차주를 금융 시스템 안에 두려는 게 목적이라면 이 방법이 더 적합하다. 

신용사면의 가장 큰 특징은 신규 대출이 불가능했던 수십만명에게 대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행의 13일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대출 규모는 지난 2월 사상 처음으로 1100조원을 넘어섰다. 우리 가계대출은 2021년 2월 1000조원을 돌파하고, 3년만에 10% 넘게 증가했다. 

■ 한국형 서브프라임의 발생=신용사면은 금융위가 지난 12일 시작한 ‘신속 신용회복 지원 조치’를 말한다. 2021년 9월 1일부터 2024년 1월 31일까지 대출 연체금이 2000만원 이하인 차주가 오는 5월 31일까지 연체 금액을 전액 상환하면 연체 기록 자체를 삭제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대상자는 개인 298만명(나이스평가정보 기준), 개인사업자 31만명이다. 이미 개인 264만명, 개인사업자 17만5000명이 연체 기록 삭제 조건을 충족시켰다.

신용사면을 통해서 연체 기록 자체를 없애면, 사실상의 서브프라임(부적격) 대출이 급증할 가능성이 있다. 연체 기록이 삭제되지 않았다면 신용평점이 낮아 적격(프라임) 대출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금융권 대출을 받을 길을 열어주는 게 신용사면의 사실상 목적이기 때문이다. 

신용사면으로 카드회사에서 신규 대출을 받을 만큼 신용평점이 상승하는 사람은 개인 15만명이다(신규 카드 발행). 은행권 신규 대출이 가능해지는 사람은 개인 26만명, 개인사업자 7만9000명이다.

■ 신용사면의 문제점=정부가 신용사면을 시행한 건 이번을 포함해 네차례다. 2000년 1월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신용불량이 된 32만명의 금융 정보를 삭제했다. 2013년 7월 박근혜 정부는 외환위기 당시 보증을 섰다가 신용불량이 된 11만명의 채무불이행 정보를 삭제했다. 2021년 8월 문재인 정부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대출을 연체한 228만명의 기록을 삭제했다.

그런데 이번 신용사면은 명분도 약하고, 대출과 연체율이 동반 상승하는 시기에 맞지 않는 처방일 수 있다. 신용회복을 돕는 장치도 이미 존재한다. 2002년 설립된 신용회복위원회가 대출 연체가 발생한 차주를 돕고 있다. 신용회복위원회는 연체 기간에 따라서 채무를 경감해주기 때문에 실질 혜택은 더 많다. 패스트트랙을 적용하도록 하면 신속성도 해결된다. 

신용사면이 법률이 아닌 합의를 통해서 시행된다는 것도 문제다. 이번 신용사면은 금융위원회가 지난 1월 15일 금융권 협회, 상호금융중앙회, 한국신용정보원 등과 ‘서민·소상공인 신용회복 지원을 위한 금융권 공동협약’을 체결한 결과다. 미국에서조차 서브프라임 대출은 법을 고쳐 시행됐다.

더구나 우리 신용사면은 기록 자체를 없애기 때문에 은행들의 깜깜이 심사를 조장할 가능성도 높다. 최근 3년간 두번의 신용사면에서 총합 500만건을 훌쩍 넘는 대출 연체 기록이 삭제됐다. 은행들의 깜깜이 대출 심사가 심해지면, 피해는 금융 소비자들로 전이된다.

■ 미국 서브프라임 연체율=신용사면으로 부적격 대출이 늘어나면 금융 건전성에 부담을 줄 공산이 크다.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 대출이 파생상품과 결합하고, 담보인 주택 가격이 하락해 금융위기를 불러왔다.

미국은 1980년 이자율 상한선을 없애고, 연체 가능성이 높은 차주에게 수수료와 이자율을 높게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미 국세청이 1986년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세액공제 대상에 넣은 후 서브프라임 대출이 지역 대출회사를 통해서 급증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대출 문제에서 시작했다. 2007년 캘리포니아주 안티코의 한 주택에 은행 압류 표지가 붙어있다. [사진=뉴시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대출 문제에서 시작했다. 2007년 캘리포니아주 안티코의 한 주택에 은행 압류 표지가 붙어있다. [사진=뉴시스]

미국 주택 가격이 2000년대 초반부터 2006년까지 급등세를 이어가자 서브프라임 대출도 폭증했다. 은행들은 서브프라임 주담대의 위험성을 인지했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파생상품을 활용해 부적격과 적격 주담대를 섞어 유동화증권을 만들었다. 하지만 주택 가격 하락으로 서브프라임 차주가 대거 파산하자, 위험은 오히려 유동화증권, 관련 보험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서브프라임 대출의 근본 문제는 다시 연체될 가능성이 그만큼 많다는 점이다. 팬데믹 이후 미국의 서브프라임 차주 비중은 줄고있지만, 연체율은 여전히 높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올해 1월 12일 발표한 ‘서브프라임 자동차·신용카드 연체율에서 신용등급 변화의 효과’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서브프라임 차주 비중은 전체의 23%에서 팬데믹 이후 17% 수준으로 감소했지만, 연체율은 여전히 높았다. 

뉴욕 연은은 2023년 3분기 기준 자동차 대출에서 서브프라임 대출의 연체율이 15.2%로 적격(프라임) 차주의 연체율 2.6%보다 7배 가까이 높았다. 신용카드 대출에서도 서브프라임 대출 연체율은 15.4%로 적격 차주의 연체율 5.3%보다 3배 가까이 높았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ayhan0903@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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